[사설]한광옥 비서실장, 직언하지 못할 거면 시작도 말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4일 00시 00분


 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호남 출신이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낸 한광옥 대통합위원장을 새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로 대통령 자리까지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다분히 야권을 의식한 인사다. 한 실장은 “대통령이 민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통로가 되도록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전임 실장들도 비슷한 다짐을 했다. 이 엄중한 시기에 신임 실장이 말로만 민의 전달을 다짐하고, 야권의 공격을 막아 내는 방패막이 역할만 할 요량이라면 아예 시작도 않는 게 낫다.

 전임 이원종 비서실장은 최순실 씨의 청와대 출입 여부에 대해 “제가 본 일도, 들은 일도 없다”고 했다. 돌이켜보면 이 전 실장은 대통령 주변과 청와대 돌아가는 사정을 전혀 모른 핫바지였다는 얘기다. 최 씨가 대통령 권력을 이용해 국정 농단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도 비서실장들이 이재만 전 총무, 정호성 전 부속, 안봉근 전 국정홍보 비서관 등 ‘문고리 3인방’조차 감독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안종범 전 정책기획수석이 대통령의 부당한 지시에 “안 된다”는 말을 못 했을 정도면 다른 수석들도 마찬가지일 게 뻔하다. 한 실장은 비정상적 비서실 시스템을 정비하고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통령이 집무실에 나오지 않고 관저에서 서면(書面)보고만 받는 것도 정상적으로 보기 어렵다. 조윤선 전 정무수석(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김규현 외교안보수석이 대통령을 독대한 적이 없다는 점도 놀랍다. 대통령이 폐쇄적인 업무 스타일에서 벗어나 장관이나 참모들과 직접 대면하며 국정을 논할 수 있도록 한 실장이 이끌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통로’가 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비서실장의 소임은 대통령이 바르게 판단하도록 돕는 것이다. 지금 국민이 무엇을 원하는지 민심을 가감 없이 전해 청와대가 무너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한 실장이라도 직(職)을 걸고 직언(直言)을 하는 진정한 참모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대통령과 국가에 마지막 봉사를 하기 바란다.
#이원종#비서실장#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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