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일 짙은 회색 상하의 차림으로 청와대 춘추관 기자회견장에 선 박근혜 대통령의 얼굴은 수척했다. 잠을 이루지 못한 듯 눈자위에 붉은 기운이 엿보였다. 발언 도중 목소리가 여러 차례 떨렸고 눈물이 고이기도 했다. 이날 담화는 오전 10시 반부터 9분 20초에 걸쳐 생중계로 진행됐다. 지난달 25일 95초 동안 이뤄진 ‘녹화 사과’ 비판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이날 “서글픈 마음” “괴롭기만 하다” “가슴이 찢어진다” “참담” “사죄” “자괴감” 등 감성적 표현을 여러 차례 썼다. 한국갤럽이 이날 발표한 여론조사에서 지지율이 5%까지 떨어지자 전통적 지지층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5일 대규모 촛불집회가 예정된 점도 감안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구체적인 국정 수습 방안과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에 대한 언급이 없어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
[① 미르-K스포츠 설립 관여 의혹]“국가경제 위해 추진… 수사 걸림돌 될까 말못해”
두 재단 거론 안해… “특정인이 이권” 최순실 잘못 강조
안종범 전 대통령정책조정수석비서관이 검찰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과 모금을 지시했다”고 진술함에 따라 박 대통령이 두 재단 설립과 운영에 관여했는지 스스로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4일 담화에서 미르·K스포츠재단을 직접 거명하지 않았고, 구체적 해명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헌신적으로 뛰어줬던 공직자들과 선의의 도움을 줬던 기업인들에게 큰 실망을 드려 송구스럽다”, “국가 경제와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바람에서 추진된 일이었는데 특정 개인이 이권을 챙기고 위법 행위까지 저질렀다고 하니 안타깝고 참담한 심정”이라고 간접적인 표현만 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한 뒤 창조경제와 문화융성을 국정 운영 방향으로 제시했다. 두 재단 설립은 이와 관련된 일인데 최순실 씨 등이 개입하면서 “모두 비리로 낙인찍히고 있다”고 항변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일부의 잘못이 있었다고 해도 대한민국의 성장동력만큼은 꺼뜨리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두 재단에 관해 구체적 설명을 하지 않은 이유를 “공정한 수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해 모든 말씀을 드리지 못하는 것뿐이며 앞으로 기회가 될 때 밝힐 것”이라고 했다. 실제 야당에서는 박 대통령의 이날 발언에 대해서도 “가이드라인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다만 박 대통령이 검찰과 특별검사의 수사를 수용하겠다고 밝혔기 때문에 조사를 받으면서 구체적으로 진술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검찰의 수사가 마무리된 뒤 박 대통령이 이에 대해 국민에게 다시 설명할 가능성도 있다.
일각에서는 아직 이번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상태에서 구체적인 해명을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 여권 인사는 “이제 수사 초반인데 새로운 내용이 나올 때마다 대통령이 해명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② 최순실과의 관계]“홀로 살며 챙길 개인사, 오랜 인연 최순실 도움 받아”
사이비 종교-굿판 부인… 최순실에 의존 이유는 해명 부족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은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 씨의 관계다. 최 씨가 미르·K스포츠재단 등에 관여하는 과정에 박 대통령과의 ‘직거래’가 있었는지, 최 씨가 박 대통령의 통치 행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이를 통해 이익을 챙겼는지 등을 밝히는 게 핵심이다.
이는 박 대통령만이 정확히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4일 담화에서 구체적인 설명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갔다.
박 대통령은 최 씨와의 개인적 친분에 대해선 “과거 어려움을 겪을 때 도와준 인연”이라고만 했던 지난달 25일 ‘대국민 사과’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홀로 살면서 챙겨야 할 여러 개인사를 도와줄 사람조차 마땅치 않아 오랜 인연을 갖고 있었던 최 씨로부터 도움을 받게 됐고 왕래하게 됐다”고 했다. 최 씨가 의상 공급 등 박 대통령의 ‘잔일’을 맡아 주면서 교류가 이어졌다는 뜻으로 들린다.
이어 “개인적 인연을 믿고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에게 엄격하지 못한 결과가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최 씨에 대한 신뢰를 최 씨가 악용했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하지만 “가족 간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낸” 박 대통령이 왜 최 씨와의 왕래는 끊지 못했고 청와대의 보좌진 대신 최 씨에게 ‘여러 개인사’를 맡겼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추가 해명이 필요한 부분이다.
박 대통령은 다만 “심지어 내가 사이비 종교에 빠졌다거나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데,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며 최 씨의 부친 최태민 씨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야권과 일부 언론에서 ‘사이비 종교 교주인 최태민 씨와 박 대통령이 종교적으로 연결됐고, 최순실 씨와도 종교적 관계 때문에 가깝다’는 취지의 의혹을 제기한 것에 적극 반박한 것이다.
[③ 국정운영 어떻게]“대통령 임기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계속 돼야”
나를 조사하되 국정 정상화 맡겨달라는 의지 표현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담화에서 “모든 책임을 질 각오가 돼 있다”면서도 “지금 우리 안보가 매우 큰 위기에 직면해 있고 우리 경제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어 “더 큰 국정 혼란과 공백 상태를 막기 위해 진상 규명과 책임 추궁은 검찰에 맡기고 정부는 본연의 기능을 하루속히 회복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검찰과 특별검사 조사를 수용한 만큼 국정 정상화를 위한 정치권의 협조를 당부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의 임기는 유한하지만 대한민국은 영원히 계속돼야만 한다”고도 했다. 박 대통령 스스로 ‘임기’ 문제를 언급한 것을 놓고 정치권에선 해석이 분분했다. 담화의 전체 맥락을 놓고 보면 정치권 안팎의 하야나 2선 후퇴 요구에도 직접 국정을 챙기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담화에 책임총리제 등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을 내려놓겠다는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나온 발언이기 때문이다.
실제 야권은 물론이고 전문가들도 박 대통령이 2선 후퇴를 전제로 야권에 거국내각 주도권을 줄 생각은 없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다만 박 대통령이 검찰 및 특검 수사에 협조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겠다고 밝힌 만큼 상황을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임기 5년을 다 채우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걸 포함한 발언 아니냐는 것이다. 한 여권 관계자는 “박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를 포함해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자세로 국정 정상화의 절박감을 나타낸 듯하다”고 말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임기 언급에 대해 “정치권이 심각한 국정 공백을 해결하는 데 힘을 집중해야 한다고 호소한 것”이라며 “박 대통령이 임기 단축이나 하야를 고려하고 있다는 취지는 전혀 아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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