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용의 다른 경제]비선의 존재, 경제 관료들은 진작 알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9일 03시 00분


코멘트

홍수용 논설위원
홍수용 논설위원
 등산복 차림의 중년 부부는 5일 저녁 서울 지하철 3호선 안국역에서 ‘이건 나라도 아닙니다’라는 포스터를 봤다. “박근혜 대통령이 해도 너무했다”라는 남편 말에 아내는 “최저임금 몇 푼 때문에 그 난리를 치더니…”라고 혀를 찼다. 이날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 참석해 “하야”를 외치다 목이 쉰 부부를 보면서 필자는 절망이 깊으면 그 골짜기가 눈에 보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금융에 무지한 실세”

 한 시민단체 사무총장은 ‘개돼지’보다 심한 욕설로 박 대통령을 스피커가 터질 듯이 저주했다. 그러나 시위 전문가의 연출된 흥분은 시민들이 가감 없이 쏟아낸 절망에 비해 울림이 크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두 차례에 걸친 사과문은 역풍만 불렀다. 첫 번째는 비선 실세 최순실 씨가 국정을 전방위로 농단한 사실을 숨긴 채 사과한 비겁함 때문에, 두 번째는 국정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뻔뻔함 때문에 공분을 샀다.

 세 번째에 보완을 한다고 해도 국민이 용서할 것 같지 않다. 박 대통령이 ‘완전한 절망 상태’임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한 그렇다. 현실은 지하 10층인데 대통령 자신은 지상 2, 3층은 된다고 상상하니 비상구가 보일 리 없다. 박 대통령이 어제 정세균 국회의장을 만난 것을 계기로 지지율이 회복될 것으로 기대한다면 여전히 착각 속을 헤매는 것이다. 국민이 대통령 손에 탈당이라는 다음 카드가 들어 있는 것을 아는데 민심이 돌아설 리 있겠나.

 “선의와 강철 같은 비정함이 동반되는 원칙을 좋아한다”는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말은 사적, 공적 영역 사이에 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경고다. 박 대통령은 선의만 강조했고 공공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외면했다. 대통령은 지금 골수 보수층까지 등을 돌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박정희 동상 건립 반대 움직임은 시작일 뿐이다. 중공업 육성정책 등 박정희 시대의 경제 성장에 가려진 정책들의 맹점이 드러나기 시작한 지금은 ‘한강의 기적’ 역사도 다시 써야 할 판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대통령의 ‘여야 합의 총리’ 제안에 반대하고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가 박 대통령의 퇴진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것은 국정 공백 상태를 즐기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이면에는 현 경제를 보는 안이함이 깔려 있다. 지금껏 경제 상황에 정말 절망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구호로서 위기를 외쳐 왔을 뿐이다.

 관료사회는 절망은커녕 쾌재를 부르고 있다. 공무원들은 진작 비선의 존재를 직감했다. 경제정책 방향이 청와대에 보고된 뒤 숫자가 바뀌고 예산안 규모가 조정되는 일이 허다했다고 한다. 금융 현안에 아무 언급이 없는 것을 보고 비선 실세가 금융에 무지하다는 판단도 정권 중반 무렵 내렸다. 돌이켜보면 그때 게임의 승부는 결정이 났다. 선출 권력인 대통령과 국회의원이 제구실을 못 하는 사회에서 승자는 언제나 관료라는 사실, 관료집단은 알고 있었다.

쇼는 접고 마지막 소통을

 한국은 지금 남창(男娼)과 CF 감독이 포함된 자문그룹이 대통령의 측근이었다고 외신이 보도해도 그 흔한 해명자료 하나 못 내고 있다. 한국 기업의 해외 주재원들은 국격의 추락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대기업 나이지리아 주재원으로 근무하는 이승의 씨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지난해 말라리아에 걸려 죽을 뻔했지만 링거 주사만 맞고 사무실을 지켰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그저 들어보면 안다. 대통령이 누구나 들으면 느낄 수 있는 진심 어린 소통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길 바란다.
  
홍수용 논설위원 legman@donga.com
#최순실#여야 합의 총리#안철수#박근혜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