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섬세한? 불통만 보이더라

  • 주간동아
  • 입력 2016년 11월 19일 20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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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가면을 쓴 최순실 씨를 미국 ‘타임’ 표지에 합성해 만든 패러디 팻말이 등장했다. [뉴시스]
11월 12일 서울 광화문광장 촛불집회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가면을 쓴 최순실 씨를 미국 ‘타임’ 표지에 합성해 만든 패러디 팻말이 등장했다. [뉴시스]
2012년 12월 19일 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하자 많은 언론이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보도했다. 헌정사상 최초 여성 대통령이 탄생한 장면은 그 나름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동안 국회의원이나 고위 공직사회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꾸준히 늘어왔기에 여성 대통령의 등장은 여성의 정계 진출에 화룡점정(畵龍點睛)처럼 생각될 수 있었다. 여성 참정권 역사 자체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여성의 정치적 성장은 비교적 짧은 시간 내 괄목할 만한 수준으로 이뤄졌다.

그 과정은 여성 정치인의 리더십에 대한 기대로 이어졌다. 어떤 기대였을까. 남성 정치인이 갖지 못한 어떤 부분을 여성 정치인에게 기대했던 것일까. 먼저 여성은 남성에 비해 덜 부패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동안 사회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갔기에 남성 간 각종 네트워크를 통한 부패가 만연했고, 그에 비하면 여성은 오염된 환경에 덜 노출돼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여성 정치인에게서 모성(母性) 리더십을 찾고자 하는 시선도 많았다. 어머니가 자식을 애정으로 품어주듯, 국민을 따뜻하고 섬세하게 품으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기대는 화해와 소통의 리더십이었다. 대결문화에 갇혀 있는 남성의 정치는 갈등과 충돌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지만, 여성 정치인은 대화로 갈등을 풀어가는 능력을 보여주리라는 기대였다. 물론 이 같은 기대가 어떤 과학적, 통계학적 근거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접한 일반 여성의 모습에서 유추한 것이니 터무니없는 기대도 아니었다.

여성 정치 리더십에 대한 기대

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에서 목도되는 전율할 장면들은 여성 리더십에 대한 이 같은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모든 기대를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만든 장본인이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사실 앞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해 있다. 집권 3년 9개월 동안 보여준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도덕적이지 않고, 어머니처럼 따뜻하지도 않으며, 마음을 열고 소통하지도 않았다.

앞으로 검찰 수사와 특검으로 정확히 가려지겠지만, 최순실 씨가 주도한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 과정에 박 대통령이 직접 개입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상태다. 그 밖에도 국가기밀 자료 유출을 박 대통령이 몰랐을 리 없다는 상식적인 의구심이 이어지고 있다. 그럼에도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라고 반박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모습은 도덕성과 거리가 멀다. 박 대통령은 지금도 고해성사를 거부한 채 진실을 은폐하고 있다.

또한 박 대통령은 자신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스르는 사람 찍어내기, ‘배신의 정치’로 낙인찍은 정치인을 향한 집요한 보복 등 모성의 정치와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왔다. 다른 사람을 품어주는 박 대통령의 모습을 본 기억이 없고, 충성하지 않으면 응징하는 대통령의 모습만 우리 뇌리에 박혔을 뿐이다.

그리고 박 대통령은 소통과는 담을 쌓은 채 청와대라는 성안에서 지냈다. 최순실 씨와 많이 소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정작 국정을 책임진 장관들은 대통령과 독대할 기회조차 갖기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대통령비서실 정무수석으로 재임한 11개월 동안 박 대통령을 독대한 적이 없다고 밝혀 국민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국민과 소통은 두말할 것도 없다. 국민 마음을 읽지 못하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듯한 발언을 일삼았고, 대국민사과문을 읽고는 질문도 받지 않은 채 퇴장해버리곤 했다. 불통 대통령이라는 이름은 3년 9개월 내내 박 대통령을 따라다녔다.

이러고 보니 굳이 여성 대통령이라는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무색해졌다. 생물학적 차이를 표현하는 것 외에는 남성 리더십과 차별점이 없다는 것이 판명됐기 때문이다. 아마 ‘첫 여성 대통령’이라는 표현을 가장 불편해하는 층이 대한민국 여성일지도 모르겠다.

여성 리더십에 대한 기대를 실망으로 만든 것은 비단 박 대통령만이 아니다. 심각성 면에서 박 대통령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야당 여성 리더들도 불안정한 모습을 드러내며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추미애 대표는 제1야당의 첫 여성 대표라는 점에서, 그리고 여성 대통령을 상대하는 여성 야당 대표라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하지만 거듭되는 대형 실책으로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으며 자신의 역량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자초했다. 당대표 취임 직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을 예방하겠다는 깜짝 발표를 해 당 안팎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결국 그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다. 야당으로서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을 당내 논의조차 거치지 않은 채 혼자 덜컥 결정해버린 탓이었다. 그런데도 비슷한 잘못을 최근 박 대통령에게 영수회담을 제안함으로써 반복했다. 야권 3당의 공조 속에서 박 대통령과 대화를 거부하던 야당 대표가 당내 논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그 같은 결정을 한 데 대해 야권 안팎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정치도의적으로 다른 야당의 뒤통수를 치는 행위였기에 자칫 민주당 전체가 여론으로부터 고립될 처지에 놓였고, 결국 추 대표의 나 홀로 결정은 의원총회에서 뒤집히고 말았다.

야당의 여성 리더십도 불안정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추미애 대표(왼쪽)가 11월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 마련된 민주당 천막 농성장을 방문해 농성 중인 박범계 의원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추미애 대표(왼쪽)가 11월 1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앞에 마련된 민주당 천막 농성장을 방문해 농성 중인 박범계 의원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추 대표의 반복되는 대형 실책은 최소한의 소통 과정도 없이 밀실에서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데 따른 결과였다. 박 대통령을 불통이라고 비판해온 야당이건만, 야당의 여성 대표 또한 소통 부재로 평지풍파를 일으키는 오류를 범한 셈이다.

2014년 제1야당 첫 여성 원내대표에 선출돼 곧이어 비상대책위원장까지 맡았던 민주당 박영선 의원도 소통의 결여로 곤욕을 치른 바 있다. 당시 박 위원장은 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세월호 특별법) 최종 협상 내용과 관련해 당내 의견, 더구나 유족의 의견을 듣는 과정 없이 혼자 새누리당과 전격 합의해 사면초가 신세가 됐다. 특검 추천권을 양보하는 대신 진상조사위원회에 유가족 추천분 3명을 얻어냈다는 설명이었지만, 당시 여론과 유가족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합의안은 뒤집히고 말았다.

당시 박 위원장은 세월호 특별법 협상으로 리더십에 큰 타격을 입고 얼마 후 원내대표직을 사퇴했다. 세월호 특별법의 동력 상실을 우려해 현실적인 타협안을 찾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그 중대한 사안을 나 홀로 결정해 리더십에 문제를 드러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여성 정치인의 리더십은 이런저런 우여곡절 속에서 아직까지 안착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지금까지 지켜본 여성 정치인의 리더십 사례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 리더십을 논할 때 굳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본질은 아니라는 점도 분명하다. 다만 온 국민의 관심 속에서 국가 혹은 정당을 책임지는 자리에 오른 여성 리더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거꾸로 여성의 정치적 입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우려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 정치를 이끄는 여성 리더의 각성 혹은 분발이 요구된다.

유창선 정치평론가 yucs1@hanmail.net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6년 11월 23~29일자 106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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