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를 향한 시민들의 분노는 일주일 전보다 더 끓어올랐다. 하지만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그보다 더 컸다.
19일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이 주최해 전국 각지에서 열린 4차 촛불 집회에 주최 측 추산 98만 명(경찰 추산 27만2000명)이 몰렸지만 경찰에 연행된 시민은 한 명도 없었다. 부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일주일 전 서울 도심 집회에서는 시민 23명이 연행되고 경찰과 시민 64명이 다쳤다.
○ “세계에서 가장 폼 나는 시위 만들자”
이날 서울 도심에서 열린 촛불 집회는 오후 1시 서울광장에서 한국노총 주최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로 시작했다. 하지만 이날 광화문광장을 찾은 시민 60만 명(주최 측 추산) 가운데는 노동단체나 시민·사회단체보다 개인이나 가족 단위 참가자가 많았다. 집회가 지난주와 달리 전국 곳곳으로 분산되면서 단체 상경이 줄었기 때문이다.
거리와 광장 곳곳에는 ‘박근혜 퇴진’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는 시민이 많았다. 주부 박혜영 씨(42)도 두 초등학생 자녀와 손을 잡고 이날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박 씨는 “오히려 아이들이 참여하고 싶다고 해서 내가 끌려나왔다”라면서 “아이들과 노래를 따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오후 4시 사전 문화제로 시국 강연과 시민 발언이 이어지자 시민들은 경청했다. 박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행적 의혹에 관한 시국 강연이 진행되는 동안 광장은 숙연해졌다. 일부 시민은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 오후 5시 이후 날이 어두워지자 시민들은 양초에 불을 밝히거나 발광다이오드(LED) 촛불 등을 꺼내 들었다.
이날 촛불 집회의 하이라이트는 오후 6시부터 시작된 문화 공연이었다. 특히 오후 8시쯤 가수 전인권이 무대에 오르자 시민들은 환호했다. 그가 시민들에게 익숙한 ‘상록수’, ‘걱정말아요 그대’ 등을 열창할 때마다 시민들은 크게 따라 불렀다. 전인권은 “지금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라면서 “세계에서 가장 폼 나는 촛불시위가 되게 하자”라고도 외쳤다. 문대성 씨(64)는 “예전처럼 과격한 장면이 연출되지 않고 축제처럼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덕분에 퇴진 구호가 더 잘 전달되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 ‘시민의식’으로 떼어 낸 ‘평화’ 스티커
오후 7시 반부터 시작된 행진 역시 평화로웠다. 지난주 경찰과 시위대 간에 긴장이 오갔던 서울 종로구 내자동 교차로에서는 풍물 공연이 벌어졌다. 거리 곳곳에는 시민 발언대가 5곳 이상 자발적으로 마련됐다. 시민들은 대치하고 있던 경찰에게 꽃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김형민 씨(33)는 “분노한 시민들의 절제력도 대단하다”라고 말했다.
시민들은 경찰 차벽에 올라가는 대신 평화를 상징하는 꽃 스티커를 붙였다. 예술단체 ‘세븐픽처스’는 이날 차벽을 꽃벽으로 만들자는 퍼포먼스 차원에서 시민들에게 꽃 스티커 3만 장을 배포했다. 차벽은 이내 스티커로 뒤덮였고 시민들의 기념촬영 행렬이 이어졌다. 오후 10시가 넘어 집회가 끝나가자 시민들은 스스로 붙였던 스티커를 떼어 내기 시작했다.
중학생인 강은이 양(13)도 친구와 함께 스티커를 떼어 내는 데 동참했다. “왜 고생해서 떼느냐”라고 묻던 어른들은 “경찰은 잘못한 게 없는데 고생할 게 걱정된다”라는 강 양의 대답에 대견스러워했다.
한편 이날 오후 2시 서울역광장에서는 박사모(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 한국자유총연맹 등 80여 개 보수단체 회원 1만1000명이 모여 맞불 집회를 열었다. 참가자들은 광화문광장 방면으로 행진했지만 차벽이 설치된 숭례문에 이른 뒤 서울역광장으로 되돌아가 집회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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