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5시 20분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에 선 정연국 대변인은 검찰의 ‘최순실 게이트’ 수사 결과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 뒤 “환상과 추측”, “인격살인” 등 강한 어조로 불만을 쏟아냈다. 당연히 맨 처음에 나올 것으로 예상했던 사과의 말은 맨 마지막에 “송구하다” 딱 한 단어만 들어갔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박근혜 대통령이 검찰 수사의 ‘피해자’인 것처럼 들렸을 것 같다.
청와대로서는 억울한 점이 있을지 몰라도 검찰의 공소장 내용 가운데 몇 가지만 살펴봐도 박 대통령이 할 말은 별로 없어 보인다.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 자체는 “뚜렷한 정책 목표를 가지고 추진한 일”(20일 박 대통령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이라고 하니 법적 다툼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최순실 씨가 미르재단에서 일할 임직원을 직접 면접을 본 뒤 선정했다”는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박 대통령이라는 ‘뒷배경’이 없었다면 최 씨가 신생 공익재단의 인사에 관여할 순 없었을 것이다.
2014년 ‘딸 친구의 아빠가 운영하는 회사가 대기업에 납품하게 해 달라’는 최 씨의 부탁을 받은 박 대통령이 당시 안종범 경제수석비서관에게 “알아보라”는 지시를 한 것, 박 대통령이 광고회사 플레이그라운드의 자료를 안 전 수석에게 주며 “대기업에 전달하라”고 했다는 부분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박 대통령은 ‘최 씨가 민원의 대가로 명품 가방과 돈을 받은 것이나 플레이그라운드의 설립자가 최 씨라는 점을 몰랐다’고 주장할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납품이나 광고 수주같이 이권 개입 소지가 많은 분야에 대통령이 특정한 지시를 하는 것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일까.
그렇기에 최 씨에 대해 “경계의 담장을 낮춰”(박 대통령 4일 대국민 담화) 최 씨가 온갖 이권에 개입할 수 있는 배경을 깔아준 박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무겁다. 박 대통령이 담화에서 “모든 사태는 내 잘못이고 큰 책임을 통감한다”고 말했지만 어떻게 책임을 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국민이 많다.
그런데도 ‘대통령은 피의자’라는 수사 결과를 놓고 청와대가 사과와 책임에는 인색하고, 유감만 부각시켜 유감스럽다. 단순히 브리핑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박 대통령의 인식이 반영된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박 대통령의 측근들도 책임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대통령의 주변을 살펴야 하는 자리에 있었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검찰에 출석하면서 “내가 대통령을 잘 못 모셨다”라는 말 대신 고압적인 자세를 보여 안 그래도 성난 민심에 불을 질렀다. ‘문고리 3인방’이라는 이재만 안봉근 전 비서관도 검찰에 나가면서 자성의 발언은 한마디도 없었다.
박 대통령과 가깝다고 해서 ‘친박(친박근혜)’이라고 불리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박 대통령을 만드는 데 일조를 했고, 박 대통령과 함께 현 정부를 이끌어온 인물들인 만큼 박 대통령의 책임도 나눠 갖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성의가 느껴지지 않는 사과를 간헐적으로 내놓을 뿐 제대로 책임을 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탄핵’ ‘출당’을 외치며 박 대통령과 선긋기에 나선 비박(비박근혜) 진영 인사들도 그다지 떳떳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 중에는 박 대통령이 힘이 있던 때에는 “알고 보면 박 대통령과 친하다”고 호소하고 다녔던 사람들이 적지 않다.
많은 국민이 최순실 사태 이후 ‘집단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한다. 나라는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국민은 화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몰라 답답해하는데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 더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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