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 하나. 마초적인 한국 문화에서 자란 기성세대 남자가 여성을 이해하게 되는 때는? ①첫사랑에 빠졌을 때 ②결혼할 때 ③딸을 낳았을 때. 내 경우 답은 ③이다. 감히 여성을 ‘이해’하게 됐다고 느낄 때 한 가지는 분명해진다. 적어도 내 딸이 내 어머니 같은 삶을 살아서는, 내 아내처럼 남성 우위 문화에서 자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흉터도 한 줌 흙 된다더니
오해 마시라. 딸이 없으면 여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니까. 내 경우 그렇다는 얘기다. 다행히 여권(女權)은 때론 버거울(?) 정도로 많이 신장됐고, 아들에겐 막말에 가까운 큰소리를 쳤던 나도 딸에겐 큰소리를 낸 일이 없다.
올해 고3인 딸의 대입 논술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다른 두 딸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대통령이 됐으나 국정을 말아먹은 박근혜 대통령과 아버지의 후광(?)으로 박 대통령을 말아먹은 최순실. 그런 후광이라면 물려주지 않는 편이 낫다고 자위하면서도 크든, 작든 물려줄 후광이라고는 없는 아버지들은 왠지 작아진다.
정치부장으로 2012년 대선 취재를 지휘한 나는 그해 초 SBS ‘힐링캠프’에 출연한 박 대통령을 뚜렷이 기억한다. 그는 얼굴에 남아 있는 커터 칼 피습사건의 흉터에 대해 “그때 조금만 상처가 깊었다면 죽을 수도 있었다. 그 이후의 삶은 덤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한 줌 흙으로 돌아가면 (흉터는) 없어진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여성답지 않게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발언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듯한 태도는 그가 남겼다는 “전방은요?” “대전은요?”라는 단문과 결합돼 위기에 강한 지도자상을 부각시켰다. “영국 대처 내각의 유일한 남자는 대처”라는 말이 있듯 “박근혜 캠프의 유일한 남자는 박근혜”라는 말도 돌았다. 모두가 그런 줄만 알았다….
그런데 ‘피습 이후 삶은 덤’이라고 했던 박 대통령이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돈 많고 막돼먹은 ‘강남 아줌마’와 어울려 혈세로 사들인, 이름도 처음 듣는 미용주사제를 맞고 함께 드라마를 즐기다 국정까지 말아먹었다니…. 세칭 ‘아줌마’는 가족, 특히 자식을 위해서 억척이고 때론 염치없을 때도 있다. 자식도 없이 “대한민국과 결혼했다”던 대통령이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하고 최순실 일가를 위해 벌인 행태는 자식에게 목숨 거는 아줌마 못지않다. 최순실 일가만이 유일한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그런 최순실이 박 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끝내고 “지가 아직도 공주인 줄 아나 봐”라고 ‘뒷담화’까지 했다니, 이런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개인적으로는 참을 수 있다. 박 대통령도 여성이니 외모에 신경 쓸 수도, 드라마에 빠질 수도 있다. 대통령의 개인용품에 세금이 들어가는 게 어디 미용주사제뿐이겠는가. 그래도 딱 하나만은 참을 수 없다. 이 땅의 딸 가진 아빠로서 여성 리더십을 희화화(戱畵化)시킨 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 오죽하면 뉴욕타임스가 ‘첫 여성 대통령의 스캔들로 한국민들 사이에서 여성을 지도자로 뽑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번져 여성의 지위가 더 악화될 우려가 있다’고 보도했겠는가.
女리더십 희화화 용서 못해
우리의 딸들에게 지은 죄만으로도 박 대통령은 더 이상 대통령이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 것이라고 착각해선 안 된다. 국민적 신뢰를 잃은, 아니 국민에게 배신의 상처를 안겨준 지도자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권력을 완전히 내려놓거나, 권좌에서 내려오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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