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사 부설 21세기평화연구소를 통해 북한 노동신문을 받아본다. 외교 안보 분야를 담당하는 논설위원으로서 북의 주장과 관점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중요한 일과이지만 온통 김정은 체제 찬양 일색인 노동신문을 읽는 것은 고역이다. 요즘엔 특히 부담스럽다. 최순실 게이트 때문이다.
노동신문은 10월 31일자 5면에 ‘특대형 정치추문 사건을 통해 드러난 박근혜 <정권>의 추악한 실상을 토로한다’는 장문의 논평으로 최순실 게이트를 처음 대서특필했다. 6면 ‘청와대로 가자, 민중의 힘으로 박근혜를 징벌하자’는 기사엔 출처가 궁금한 1차 촛불집회 사진이 13장 실렸다. 이후 노동신문은 도저히 인용할 수 없는 저속한 표현으로 박 대통령을 연일 비방하고 우리 사회의 대정부 투쟁을 부추기고 있다.
북풍의 시대는 지나
얼마 전만 해도 김정은을 겨냥한 ‘참수작전’과 선제타격 훈련으로 북을 압박했던 박근혜 정권이 상상도 못 한 사건으로 오히려 무너질 지경이 됐으니 북은 환호작약할 것이다. 지난해 황병서 군총정치국장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사망)이 “(대북) 확성기 문제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해결했다”며 ‘공화국 영웅’ 칭호를 내린 김정은은 최순실이 대남 공작기구도 못 한 일을 했다고 상찬(賞讚)하고 싶지 않을까.
노동신문에서 착잡함을 느끼는 것은 속내가 뻔한 북이 박 대통령을 비난하는 근거가 지금 국내에서 논란이 되는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매체는 온갖 억측과 풍문, 괴담까지 마치 사실인 양 포장해 선전 선동에 열을 올리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남과 북에서 동시에 박 대통령 퇴진 얘기가 나오는 현실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돌아보면 북이 노동당 창건기념일인 10월 10일 우려됐던 6차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하지 않고, 11월 8일 미국 대선에서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승리하는 이변이 벌어지면서 한반도 풍향이 달라졌다. 한국 여론의 관심은 안보 위기에서 최순실 게이트로 옮아갔고, 미국은 정권 교체기에 접어들어 한미의 대북 압박은 탄력을 받기 어려워졌다. 설령 북이 도발했어도 ‘북풍’이 국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제한적이었을 것이다.
박 대통령에겐 반전(反轉) 카드가 없다. 모든 국정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될 거라던 개헌 카드는 뜻대로 먹히지 않았고, 과거처럼 안보 위기로 국내 실정을 가리는 것도 이젠 통하기 어렵다. 지금 도발하면 박 대통령을 도와주는 격이니 김정은도 한동안 트럼프 차기 미 대통령의 한반도 정책을 지켜보며 관망할 듯하다. 서해 등의 국지 도발 가능성도 있으나 박 대통령이 강력 응징에 나설 경우 그것이 정당해도 국면 전환을 노린 과잉 대응 논란이 일 공산이 크다. 북핵 사태가 여전히 엄중한데 안보가 정치의 늪에 빠졌다.
안보 위기 이용 안 된다
박 대통령은 외치(外治)를 중심으로 국정을 계속 챙기려는 듯이 보이나 별로 가망이 없다. 탄핵 위기의 한국 대통령이 북핵 공조를 얘기하면 외국 정상들이 과연 경청하겠는가. 외교 안보 분야에도 미친 최순실 게이트의 해악이 너무 크고 박 대통령이 되레 짐이 되는 상황이다. 무엇이 마지막 애국인지 박 대통령이 잘 판단했으면 한다. 북이 오늘 5차 촛불집회는 또 어떻게 보도할지 모르겠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