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광화문광장을 가득 메운 100만여 촛불시위대의 외침에도 박근혜 대통령은 꿋꿋이 버티고 있다. ‘박 대통령이 사실상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공범’이라는 검찰의 중간 수사 결과가 나오자 대국민사과 때 밝혔던 “검찰 수사에 협조하겠다”는 약속마저 스스로 뒤집었다. 탄핵을 당하거나 하야를 할 정도로 잘못한 게 없다는 인식 없이는 생각하기 힘든 대응이다.
하지만 박 대통령이 받고 있는 혐의는 결코 가볍지 않다.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서울발 기사를 통해 “최순실 게이트는 정치 부패라는 ‘한국병’이 여전함을 보여준다”며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1969∼1974년 재임)을 하야하게 만든 워터게이트 사건 때보다 최순실 게이트가 더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 유럽 남미의 해외 정상들 중에는 박 대통령보다 더 가벼운 혐의로도 불명예 퇴진한 사례가 적지 않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지난달 발간된 언론 대담집에서 시리아 군사작전에 관한 국가 기밀을 털어놓았다는 이유로 최근 탄핵 위기로 내몰리기도 했다. 언론 인터뷰 과정에서 나온 실언조차 탄핵 사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은폐, 거짓말이 탄핵 자초
진실 은폐를 시도했다가 불명예 퇴진한 대표적 사례는 닉슨 전 대통령과 관련된 ‘워터게이트’ 사건이다. 1972년 6월 17일 워싱턴의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워터게이트빌딩)에 배관공으로 위장한 남성 5명이 도청 장치를 설치하다가 경비원에게 발각됐다. 처음에는 단순 절도로 치부됐다. WP가 이틀 뒤 이들이 전직 중앙정보국(CIA) 요원과 닉슨 선거운동본부 관련자라고 보도하면서 파문이 커졌다.
닉슨은 이런 사실을 완강히 부인했고, 범행에 가담한 전직 CIA 요원은 개인적 차원에서 일을 저질렀다고 둘러댔다. 연방수사국(FBI)은 닉슨의 선거운동본부에서 5명에게 자금이 흘러갔고 긴밀한 연락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지만 수사 결과는 공개되지 않았다.
‘스모킹 건’(범죄 사건 해결의 결정적 단서)은 WP가 받은 익명의 제보였다. WP는 FBI의 익명 제보자를 통해 받은 수사 정보로 사흘이 멀다 하고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닉슨은 WP에 유·무형의 압력을 가했다. CIA를 움직여 FBI의 수사를 막으려고도 했다. 여론이 이 사건에 크게 주목하지 않는 사이 닉슨은 1972년 대선에서 재선했다.
닉슨의 재선 이후 WP뿐만 아니라 뉴욕타임스(NYT) 로스앤젤레스타임스 등도 경쟁적으로 워터게이트를 파헤쳤다. 미 언론들은 존 미첼 법무장관이 민주당 관련 정보 수집을 총괄했고 도널드 세그레티 변호사가 불법 도청 등 정치공작을 했다고 폭로했다. 재판 과정에서 충격적인 증언들이 쏟아졌다. 코너에 몰린 닉슨은 “나는 몰랐으며, 아랫사람들이 제멋대로 저지른 일”이라고 발뺌했다. 닉슨은 보좌관들만 백악관에서 내보냈다.
1973년 5월부터 상원 주최 워터게이트 청문회가 열렸다. 닉슨은 국가 기밀을 핑계로 집무실 대화 녹음테이프의 공개를 거부했다. 여론의 공세로 결국 전체 분량의 1%인 40시간분이 공개됐고, 미첼 법무장관과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 등이 도청, 문서 위조, 매수 등에 연관돼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닉슨이 거액을 탈세하고 대기업에서 불법 선거자금을 받은 사실도 추가로 밝혀졌다.
닉슨은 1973년 10월 법무장관, 차관에게 워터게이트 담당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의 해임을 지시했으나 이들은 지시를 거부하고 사임했다. 민심은 완전히 닉슨을 떠났다. 1974년 7월 하원은 닉슨의 탄핵을 결의했다. 역사상 처음 탄핵된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을 우려한 닉슨은 1974년 8월 8일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권좌를 이어받은 제럴드 포드 부통령이 그를 사면한 덕분에 처벌은 받지 않았으나, 닉슨의 이름에는 거짓말 때문에 사임한 대통령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지인에게 싼 금리로 돈 빌렸다가 탄핵
크리스티안 불프 독일 대통령은 작은 혜택을 보려다가 명예를 잃고 권좌에서 물러났다. 독일 대중지 빌트는 2011년 12월 13일 불프 대통령이 부동산 구입을 위해 니더작센 주지사 시절 기업인 출신 지인에게서 시중 금리보다 싼 연리 4%의 조건으로 50만 유로(약 6억2500만 원)를 빌렸다고 폭로했다. 불프는 첫 기사가 나간 뒤 빌트 주필, 편집국장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걸어 폭언했고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언론의 추가 보도가 이어지자 불프는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사과했다. 그러나 언론 협박 등으로 파문은 더 커졌다. 독일 국민은 “그가 대통령이란 게 부끄럽다”, “비리가 있는 대통령과는 살 수 없다”고 분노했다.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85%가 대통령 사임에 찬성했다. 야당인 사회민주당의 토마스 오퍼만 원내대표는 “대통령도 법 위에 있지 않다”며 사임을 압박했다.
이듬해 2월 16일 하노버 지방검찰청이 대통령 수사 면제권 철회를 연방하원에 공식 요청했다. 현직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수사 면제권 철회 요청은 독일 역사상 처음이다. 다음 날 불프는 자진 사퇴했다.
회계 부정도 탄핵 사유
군부 독재정권에 맞선 민주투사인 지우마 호세프 전 브라질 대통령은 2015년 부정부패와 경제난, 가뭄이라는 3중고 속에 탄핵 위기로 내몰렸다. 에너지부 장관 출신인 호세프는 2003∼2010년 국영 정유회사 페트로브라스의 이사회의장을 지냈다. 페트로브라스는 국내총생산(GDP)의 13%를 차지하며 직원이 8만 명이 넘는 남미 최대 기업이다.
2007년 당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정권이 이 회사에 신규 유전개발권을 독점으로 주는 대신 유전설비의 85%를 국산품으로 쓰게 하면서 국내 건설사 및 납품사로부터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이 폭로됐다. 비자금은 로비자금으로 사용됐다. 2014년 대선에서 호세프와 맞선 제1야당 사회민주당의 아에시우 네베스 대표는 유세에서 “호세프도 페트로브라스로부터 정치자금을 상납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호세프는 꼬리를 무는 의혹과 야권 공세에도 재선에 성공했다.
대선이 끝난 뒤 시작된 검찰 조사에서 페트로브라스의 상납 비리가 드러났다. 한 전직 임원은 “페트로브라스가 2004년부터 8년간 약 81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했고 이 중 2100억 원이 집권 노동자당으로 흘러갔다”고 폭로했다. 뇌물 조성이 한창일 때 이사회의장을 지낸 호세프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높아졌다.
결국 브라질 하원은 2015년 12월 호세프 탄핵 절차에 돌입했다. 재정적자를 감추기 위해 의회 몰래 국영은행의 돈을 끌어다 사회복지 사업에 써 연방재정회계법을 위반했다는 것이 사유였다. 올 3월 노동자당의 최대 파트너인 브라질민주운동당이 연정에서 탈퇴했다. 5월 브라질 상원은 22시간에 걸친 밤샘 토론 끝에 탄핵심판절차 개시를 통과시켜 호세프를 직무 정지시킨 데 이어 8월 상원에서 81명 중 61명의 찬성으로 최종 탄핵 평결을 내렸다.
자백으로 용서 받은 클린턴
자백으로 탄핵 위기에서 벗어난 대통령도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1998년 1월 ‘르윈스키 섹스 스캔들’이 불거지면서 탄핵 위기에 몰렸다. 클린턴이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에게 자신과의 성관계를 부인하는 위증을 교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특별검사의 수사가 진행됐다.
특검팀은 1998년 9월 수사 결과 클린턴이 위증과 사법방해, 권력남용 등 11개 항의 탄핵 사유에 해당한다는 특별보고서를 하원에 제출했다. 대통령의 범죄를 입증할 구체적 증거들이 충분히 확보된 것이다. 절벽 끝으로 내몰린 클린턴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르윈스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시인하고 용서를 구했다. 부정적이었던 여론은 클린턴의 사과로 바뀌었다. 민주당은 같은 해 11월 실시된 중간선거에서 승리했다. 상원에서도 클린턴에 대한 탄핵안이 부결돼 클린턴은 임기를 끝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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