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서울 광화문은 말로만 듣던 ‘멜팅폿’(melting pot·융합의 항아리)을 눈앞에서 목도하는 자리였다. 1∼4차 집회도 그랬지만 모든 게 뒤섞여 있었다. 현장을 채운 깃발부터 그랬다. 세종대로사거리에 모인 정당과 노동계 깃발. 그 사이를 ‘전대협 동우회’와 ‘중학생 혁명’이 가로질렀다. 뭘 뜻하는지 아리송한 ‘얼룩말 연구회’와 비아그라를 패러디한 ‘하야하그라’까지.
그 펄럭이는 아우성을 타고 온갖 노래도 비벼졌다. 민중가요와 ‘그 여자’(드라마 ‘시크릿 가든’ OST)가 양쪽에서 스피커를 찢어대자, 고속도로 디스코 리듬을 타고 ‘아리랑목동’을 개사한 ‘하야가’가 비집고 들어왔다. 경기 여주시에서 온 이모 씨(28·직장인)는 “세상에서 가장 큰 ‘풍물시장’에 온 기분”이라며 “농악대와 힙합이 묘하게 어우러지니, 분노해서 나왔는데 괜스레 흥겨워졌다”고 말했다.
옷차림도 각양각색이었다. 시위 ‘작업복’인 아웃도어도 적지 않았지만 데이트나 나들이 복장도 상당했다. 짙은 색 정장에 운동화를 신은 30대 여성은 “친구 결혼식 끝나고 같이 ‘광화문 피로연’ 하러 왔다”며 하이힐이 든 쇼핑백을 메고 있었다. 이탈리아 명품 패딩 ‘몽클레르’를 입은 아이가 고급 유모차 ‘스토케’를 탄 모습도 보였다. 쌍꺼풀이 어여쁜 아이 손엔 촛불이 들린 채. 엄마는 “많이 고민했는데 (애가) 추울까봐…”라더니 “그래도 힘을 보태고 싶었다”며 겸연쩍어했다.
허나 그 다르고 다름은 흩날리는 첫눈처럼 한 색깔로 뭉쳐졌다. 유모차나 아이가 지나갈 땐 모두들 길을 비켜줬다. 한 50대 여성은 꼬마에게 목도리를 벗어주려다 말리는 애기엄마랑 웃음 띤 실랑이를 벌였다. 서울시의회 앞에서 유모차를 인도로 함께 올려주던 남성은 “친구가 쓰던 거”라며 간이방석을 아이 품에 안겼다. KT 광화문빌딩 인근, 아빠가 목말을 태운 여자애에게 전기 양초를 쥐여준 60대 김모 씨는 “아이까지 나오게 만든 상황이 (어른으로서) 미안한 마음”이라고 말했다.
어슴푸레해지자 눈도 그쳤다. 청와대를 가렸던 눈구름도 잘금잘금 걷혀 갔다. 그리고 광장에선 문화제가 시작됐다. 가수 안치환 씨와 밴드 노브레인, ‘깜짝 손님’인 가수 양희은 씨가 무대에 올랐다. ‘아침이슬’과 ‘상록수’ ‘마른 잎 다시 살아나’와 ‘사람(하야)이 꽃보다 아름다워’ ‘비와 당신’과 ‘젊은 그대’가 어둠을 헤치고 울려 퍼졌다. 시위에서 술자리에서 노래방에서 회사 워크숍에서 부르던 곡들이 한 광장에서 손을 맞잡았다. 1987년 6월 항쟁과 2002년 월드컵과 2014년 4월 16일(세월호 참사)이 어깨동무라도 한 듯. 서로가 달라도 서로가 같다고. 그게 우리라고 감싸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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