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승줄에 묶인 채로 죄수복을 입은 실물 크기의 여성 그림이 거리에 등장하자 시민들은 “구속”을 외치며 환호했다. 다름 아닌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그 뒤를 흰 와이셔츠에 선글라스를 올려 쓴 최순실로 분장한 시민이 따라간다. 이들 주변에 ‘언니야, 감옥에 같이 가자’라는 깃발이 펄럭인다. 거리에는 신문 1면을 ‘박근혜 전격 구속’ 기사로 장식한 호외가 뿌려졌다.
5차 촛불집회가 열린 26일 서울 광화문광장에는 박근혜 대통령을 조롱하는 풍자, 패러디물이 넘쳐났다. 풍자의 수위도 높아졌다. 연일 드러나는 의혹들과 검찰 수사를 받지 않는 대통령의 모습에 국민들의 분노는 더 거세졌다.
박근혜 대통령 서거를 암시하는 풍자물도 등장했다. 검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시민 4명은 ‘가자! 최태민 곁으로’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이번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의 원인 제공자 중 한 명인 최태민 씨와 가까이 지낸 박 대통령을 조롱하고 1994년 사망한 최 씨와 운명을 함께하라는 의미였다. 서울대 혼참러(혼자 참여한 사람들)들은 박 대통령 머리 양옆에 권총을 들이댄 모습의 깃발을 들었다. 한 인쇄물 제작업체는 ‘정의의 망나니칼’ 이름의 종이칼 400개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칼에는 ‘비아그라가 웬말이냐’, ‘거세하라’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전북 고창군에서 올라온 박홍기 씨(61)는 ‘빙닭 박멸’이라고 적힌 노란 농약 통을 등에 메고 시위에 참가했다. 박 대통령 별명(닭)으로 만든 패러디다. 박 씨는 “잡초에 약을 뿌려 주듯 박 대통령에게도 약을 뿌리러 왔다”고 말했다.
지난 집회까지 최순실 정유라 모녀를 풍자한 패러디가 넘쳐났다면 이번 집회는 비아그라, 백옥주사를 대량 구매한 청와대를 비꼰 패러디가 주를 이뤘다. 거리 곳곳에 푸른색 알약을 그려 넣은 ‘하야하그라’(하야하라+비아그라) 깃발이 펄럭였고, 비아그라 구매에 대한 청와대의 해명을 비판하듯 깃발 하단에는 ‘한국 고산지 발기부전 연구회’라는 단체명이 써 있었다. 최민수 씨(37)는 “비아그라 깃발을 볼 때마다 헛웃음이 나온다. 하지만 함께 나온 아들은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좋아했다”고 말했다.
포승줄에 묶인 채 구속되는 최 씨와 박 대통령의 모습에 시민들은 통쾌해하는 모습이었다. 이보람 씨(25·여)는 “포승줄에 묶여 체포된 모습을 보니깐 속이 시원하다. 이런 식으로라도 분노를 풀어야 국민들이 ‘순실증’에서 벗어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번 집회 현장에서 가장 인기를 끈 건 ‘박근혜 없어지소’ ‘근혜씨 하야하소’라고 쓰인 소들의 등장이다. 경기 수원시에 사는 한 농민은 트럭에 자신이 키우는 소를 싣고 이곳을 찾았다. 행진 도중 경찰이 “소가 놀라면 시민들이 다칠 수 있고 소뿔도 위험하다”며 제지했으나 시민들이 “길을 열어라”, “현행법상 문제가 없는데 왜 막냐”며 항의했다. 소는 집회 참가자들의 마음을 아는 듯 얌전하게 집회 현장을 누볐다. 시민들은 소가 거리에 등장할 때마다 “박근혜 없어지소” “박근혜 하야하소”를 연발하며 환호했다.
대리운전 업체 이름을 빗댄 ‘1588-순실순실 OK! 대리연설’, ‘퇴근혜’ 등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를 담은 이색 깃발이 등장하면서 집회 참가자들은 단체 성격에 상관없이 깃발 아래로 모여들었다.
시민들은 박 대통령의 가명인 길라임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 배경곡 ‘그 여자’를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내용들로 개사해 불렀다. 원곡에서 ‘이 바보 같은 사랑, 이 거지 같은 사랑 계속해야 네가 나를 사랑하겠니’라는 부분은 ‘이 바다 같은 촛불, 이 기적 같은 집회, 계속해야 너 알아서 하야하겠니’라고 바뀌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시국을 꼬집는 풍자는 한층 더 유쾌하고 기발해지고 있다. 풍자와 패러디는 시민들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는 동시에 평화집회를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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