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누른 촛불, 잔치는 다시 시작됐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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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최대 ‘190만 촛불’]최영미 시인 촛불집회 참관기

26일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한 최영미 시인. 최영미 시인 제공
26일 광화문 촛불집회에 참여한 최영미 시인. 최영미 시인 제공
병실에 앉아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이 비추자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쟤는 얼굴이 멀쩡하네. 아무렇지도 않네."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대통령의 안색이 저렇게 좋으냐는 당신의 한탄이셨다.

역시 우리엄마는 언제나 핵심을 찌르셔. 감탄하며 내 머리에 또 다른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다. 비상시국회의에 참석한 야권 지도자들의 웃는 얼굴. '비상시국'과 어울리지 않는 그들의 환한 미소가 눈에 거슬렸다. 국민들은 나라가 걱정돼서 속이 타들어 가는데.....나라를 걱정하는 게 직업이어야 할 정치인들은- 대통령은 자기만 살 궁리나 하고 국회의원들은 우왕좌왕 국민들 눈치만 보며 계산기를 두드린다.

집회에 나가기 며칠 전에 겨울코트를 들고 의류수선실에 갔다.

"아저씨-이거 입고 촛불집회 나갈 거니까, 단추 튼튼하게 달아주세요." 내 입에서 촛불이 떨어지자마자 아저씨가 날 물끄러미 보더니 다른 일감을 제치고 내 옷을 잡았다. '촛불' 덕분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5분만에 수선이 끝난 코트는 어찌나 단추를 단단히 박았는지 십년이 지나도 안 떨어질 것같다.

비가 오지 않기를 빌었다. 비가 오더라도 젖을 만큼 쏟아지지 않기를 빌었다. 토요일 오후 1시, 어머니를 씻기고 운동시킨 뒤에 요양병원을 나오니 비와 눈이 거세게 흩날렸다. 그래 쏟아져도 지금 다 쏟아져라. 집회가 열리는 저녁엔 하늘이 뽀송뽀송 하기를 빌면서 근처의 식당에 들어가 청국장에 밥을 비벼먹었다. 추위를 이기려면 든든히 먹어야지.

집에서 좀 누워있다 택시를 타고 서대문역에 내렸다. 허겁지겁 걸어 서 친구들과 약속한 서울역사박물관에 도착하니 오후 4시 50분. 차를 마시고 일어나 광화문으로 걸어갔다. 핫팩을 나눠주는 아줌마를 나는 그냥 지나쳤다. 털모자를 쓰고 가죽장갑에 위아래 내복을 입어 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인파에 파묻혀 걷는데 촛불을 파는 노점상 앞에 긴 줄이 보였다. 그냥 촛불은 천원, Led 촛불은 이천원이었다. 더 비싸도 살텐데, 바가지를 씌우지 않고 적정한 가격을 제시하는 양심적인 상혼이 고마웠다. 바람이 불면 촛불은 꺼진다는 망언을 한 국회의원 아무개를 욕하며 Led 촛불 세 개를 샀다.

"(전등의) 위를 누르면 꺼져요."라는 노점상 아저씨의 설명을 듣고 종이컵 바닥에 전등을 끼워넣는데, 잘 들어가지 않아 옆에 선 친구가 도와주었다. 연세가 지긋한 어르신들. 아이들을 셋이나 데리고 나와 손에 손을 잡은 가족도 보였다.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딸애에게 "오늘은 엄마 손을 꼭 잡아야 해."라고 말하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이 추운 날에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부모들의 용기가 가상했다.

이미 사람들의 장벽에 가로막혀 우리 일행은 무대가 펼쳐지는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귀를 무대에 열어두고 섰다 걸었다를 반복하며 바깥을 맴돌았다. 광장의 가장자리엔 유모차를 끌고 나온 부모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밖은 시끌시끌한데 유모차 안에서 고이 자는 애들의 얼굴은 한편의 시처럼 아름다웠다. 잃어버린 아이를 찾았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사람들 사이에 기쁨의 함성이 퍼졌다.

어디선가 "영미 누나!" 소리가 들려 앞을 보니 이게 대체 몇십년만인가. 어느 정치인을 보좌한다는 대학후배를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었다. 안치환의 흥겨운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젊은이들에 섞여 나도 몸을 흔들었다. 토요일 저녁, 광화문은 해방구였다.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한 광장은 춥지 않았다. 도도한 불빛 속에 나도 촛불을 들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고 믿지는 않지만, 어둠이 빛을 이기게 내버려두고 싶지는 않아서. 젊은 날에, 87년 유월의 그 뜨겁던 거리에서도 부끄러워 외치기를 주저했던 구호를 내가 먼저 선창했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그날 처음 만나 '광장고등학교' 동문이 되기로 약조한 우리는 8시의 소등행사를 마치고 행진을 할래 말래 설왕설래하다, 중년의 건강을 생각해 발길을 돌렸다. 그냥 헤어지지 섭섭해, 전철을 타고 홍대 역에서 내려 술을 마시며 시국을 논했다.

잠룡이란 말, 맘에 안 들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든 일등공신은 이 나라 언론이 아닌가. 1년에 절반은 차기대권주자의 지지도를 싣는 신문과 방송들. 반성해야 해. 제왕에만 관심을 두는 언론이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었어. 이번에도 죽 쒀서 개 주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 누가 답을 갖고 있겠어요.

전직 국회의원과 한국노총의 연구원과 시인이 함께 한 술자리가 끝난 뒤, 홍대의 그 수상한 거리에서 술김에 우리는 또 외쳤다. 박근혜를 구속하라!!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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