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윤리적 훈련 못받은 지식인들
자존감-자부심 없고 유혹에 쉽게 지배돼
세대교체가. 혁명이 지금 필요한 이유다
질서 정연하고 규칙을 지키는 촛불 행진은 파괴력 있는 영향력을 바로 보여주는 폭력에 대한 유혹을 견뎌내고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 국민이 진보하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징이다. 퇴행적인 지배층과 달리 일반 국민은 진보하고 있다. 그런데 이 진보의 의미는 겉으로 보이는 ‘평화’ 그 자체가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오히려 ‘평화’를 가능하게 한 배후의 덕목에 있다. 사실은 이 배후의 덕목이 힘을 발휘해서 집회를 ‘평화’로 채운 것이다. ‘유혹을 견뎌내는 힘’, 다시 말해 ‘유혹에 저항하는 힘’이 우리에게 평화를 선물하였다. 촛불 속에서 빛나는 국민의 진보는 근본적으로 여기에서 발견된다. 윤리적으로 성장하였다는 점, 이것이 진보이다.
촛불 행진을 야기한 ‘박근혜 국정 농단’ 안에서 내내 아쉬움을 남기는 것이 있다. 바로 지식인들의 몰락이다. 최순실의 딸 부정 입학에도 다 교수들이 개입되어 있었고, 공조직의 사적 유용도 다 고시를 통과하거나 해외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영재급 인재들이 동조하거나 주도하여 벌인 일들이다. 국정이 농단될 때, 그런 지식인들이 부화뇌동하지 않고 한 번만이라도 ‘저항하는 힘’을 발휘했다면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강남의 어떤 아줌마에게 ‘지시’를 받을 때, 한 번만이라도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부심이나 자존감 혹은 윤리의식이 스쳐 지나가기만 했어도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지금은 분명 많이 배워 상층부를 이룬 기득권층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지식인이다.
지식이란 근본적으로 윤리적이다. 모든 지식은 ‘병’을 치료한 결과들이 지적인 장치로 체계화된 것인데, ‘치료’라는 것 자체가 원래 윤리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병’을 일반적으로는 ‘문제’라고 말한다. 그래서 지식인은 원래 시대의 문제를 발견하는 예민함과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헌신성으로 되어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이때 ‘문제’는 자기가 발견하지만, 그것이 시대를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모두 해당되는 것이란 점에서 ‘공적(公的)’이다. 문제를 발견하면 지적이고, 문제를 발견하려 하지 않으면 지적이지 않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거기에 헌신하면 지적이고, 그렇지 않으면 지적이지 않다. 모든 학문 분야에 해당되는 말이다.
중국 고대의 주나라가 멸망하고 나서 잡초가 무성한 폐허의 왕궁 터를 지나던 한 지식인이 읊은 시(詩)다. “기장만 무성하고, 피들이 가득 싹을 틔우는구나. 걸음은 더디고 마음속은 어지럽다. 나를 아는 사람은 나의 마음이 아프겠다 하는데, 나를 모르는 사람은 나에게 무엇을 찾는가 한다. 아득한 푸른 하늘이여, 이것이 누구의 탓입니까?”(‘시경·詩經’ 왕풍) 지식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무엇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아파하는 사람이다. 시대가 앓는 병을 느끼는 사람이다. 아득한 창공을 보며, 시대를 허물어지게 한 원인을 묻는다. 여기서 비로소 공적이고 윤리적인 치료 행위가 시작된다. 비로소 지식인으로 등장하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지식의 건립은 병을 치료하는 윤리적 행위의 결과이다. 이런 과정에 참여하는 지식인은 당연히 공적이고 윤리적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직접 실현하지 않고, 실현된 결과들을 수용만 하는 지식인들에게는 공적이고 윤리적인 훈련을 받을 기회가 사라진다. 생각하지는 않은 채 다른 사람이 한 생각의 결과를 받아들이기만 하고, 문제를 발견하려 덤비지는 않은 채 문제를 해결한 결과들만 수용하는 방식으로 성장한 지식인은 윤리적일 수 없다. 저항하는 힘이 있을 수 없다. 자존감도 없고 자부심도 없다.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찾는 탐욕에 지배당한다.
지금 혼란은 지식인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업보를 겪는 일인지도 모른다. 잘못 성장한 지식인들의 역할은 이제 끝났다. 그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는 한, 촛불의 희망은 달성되기 어렵다. 세대교체가 필요하고, 혁명이 필요한 이유이다. 교육의 본바탕을 회복하는 일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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