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매일 해오던 ‘오전 기자 브리핑’을 5일 건너뛰었다. ‘최순실 게이트’가 본격화된 이후 ‘적극 방어’에 나서던 정 대변인이 오전 브리핑을 취소한 건 처음이다. 비슷한 시각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가 열렸지만 모두발언을 건너뛴 뒤 곧바로 비공개 회의에 들어갔다. 전날 새누리당 비주류가 9일 탄핵안 표결에 ‘조건 없는 참여’를 선언한 뒤 청와대와 친박(친박근혜)계 지도부가 일제히 입을 닫은 것이다. 이후 이들이 꺼낸 카드는 ‘4월 퇴진 공식화’였다. ○ 한광옥 비서실장의 ‘대리 선언’
친박계 지도부는 5일 비공개 회의를 마친 뒤 “6일 의원총회에 앞서 당론으로 채택한 박 대통령 4월 조기 퇴진에 대한 입장을 청와대가 빠른 시간 안에 표명해 달라”고 공개 요구했다. 김성원 대변인은 “이정현 대표가 바로 청와대에 연락해 (이런 의견을) 전달할 것”이라고 전했다. 이 대표는 기자들을 만나 “청와대가 그것(4월 퇴진)을 받아들일 것으로 생각한다”고 했다.
청와대의 화답은 신속하게 이뤄졌다. 한광옥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날 최순실 게이트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에 출석해 “(박 대통령이) 중요한 결단을 내리실 것”이라며 “조기 퇴진 당론을 수용한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다”고 밝혔다. 또 한 실장은 ‘(지난달 29일) 3차 담화에 대해 국회와 언론이 조기 하야(下野) 선언으로 해석하는데 맞느냐’는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의 질문에 “그렇다”며 “대통령이 여러 의견을 충분히 듣고 종합해 (조기 퇴진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한 실장이 박 대통령을 대신해 4월 조기 퇴진을 공식화한 셈이다.
허원제 대통령정무수석비서관도 이 자리에서 “대통령께서 새누리당 당론이 확정된 1일 관련 내용을 보고 받고 ‘당원의 한 사람으로 당론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말했다. 당론이 확정된 1일 박 대통령이 이미 ‘4월 조기 퇴진’을 수용했다는 얘기다. ○ 청와대, ‘탄핵 이후’ 대비하나
박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통해 직접 조기 퇴진을 선언할 것이란 예상을 깨고 청와대 참모들을 통해 ‘대리 선언’을 선택한 셈이다. 여권 핵심 관계자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현재로선 박 대통령이 4차 담화를 발표하거나 기자회견을 하는 게 실익이 없다고 보고 있다”며 “담화나 기자회견의 내용을 두고 오히려 논란을 키울 수 있다”고 전했다. 어차피 9일 탄핵안 처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않겠다는 얘기다.
여기엔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판단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 비주류는 탄핵 찬성 의원을 ‘35명+α(플러스알파)’로 보고 있다. 야권 및 새누리당을 탈당한 김용태 의원 등 172명을 합쳐 탄핵 가결정족수(200명)를 충분히 넘어설 수 있다는 얘기다. 정진석 원내대표는 이날 “당론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9일 탄핵안 표결에 들어가면 우리 당도 참여해 개개인의 양심에 따라 투표하는 게 맞다. 이 대표도 동의했다”고 말했다. 본회의 집단 거부 등 ‘촛불 민심’에 역행하는 선택을 할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청와대 안에서도 즉각 하야 아니면 탄핵을 요구하는 민심이 거센 만큼 정치적 해법을 모색하기에는 이미 때를 놓쳤다는 말이 나온다. 무리하게 탄핵을 피하려 하기보다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 대비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것이다. 황교안 국무총리는 이날 총리·부총리 협의회에서 “이번 주는 어느 때보다 국정 상황이 엄중한 만큼 전 내각은 비상한 각오로 업무에 임해 달라”고 주문했다.
다만 박 대통령이 6일 새누리당 의총 상황 등을 지켜보며 추가 메시지를 내놓을 가능성은 남아 있다. 이 경우 한 실장의 ‘대리 선언’이 자신의 뜻임을 분명히 하는 형식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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