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299명 가운데 찬성 234표로 가결됐다. 야권과 무소속 의원 172명에다 새누리당에서도 62명이 찬성표를 던진 78%의 압도적 가결이고, 12년 전 노무현 대통령에 이은 두 번째 대통령 탄핵소추다. 그러나 이번엔 탄핵소추안에 적시된 내용이 훨씬 중한 데다 80% 국민이 탄핵을 지지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헌정사의 분수령으로 기록될 것이다. 헌정질서를 유린한 대통령에 대해 퇴진을 요구하는 232만 명의 ‘촛불혁명’에 마침내 국회가 탄핵안 가결로 응답했다.
국민의당 김관영 의원은 탄핵소추안 제안 설명에서 “박 대통령은 집무집행과 관련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국민이 대통령에게 부여해준 신임을 근본적으로 저버렸다”고 밝혔다. 탄핵소추안은 박 대통령이 최순실이라는 사인(私人)에게 공무상 비밀을 담은 문건을 유출하고 사기업에 특혜를 주도록 강요함으로써 헌법이 규정한 국민주권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위배했다고 적시했다. 기업들로부터 미르·K스포츠재단 모금을 위해 대통령의 직권을 남용했다는 뇌물죄, 세월호 참사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대통령이 관저에 머무르며 적극적 조치를 취하지 않아 헌법 10조의 생명권 보장 규정을 어겼다는 내용도 명시됐다.
실제로 검찰 수사나 국회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에서 드러난 행태를 보면 박 대통령이 과연 정상적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했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대통령 관저에서 일했던 전직 조리장은 박근혜 정부 초반 최 씨가 일요일마다 청와대 관저에 들어와 정호성 안봉근 이재만 등 문고리 3인방 비서관과 회의를 했고, 대통령은 동석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납득할 수 없는 인사와 국정 운영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박 대통령의 권한이 9일 오후 7시 3분 정지된 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고 “전 국무위원과 모든 공직자들과 함께 오직 국민과 국가만 생각하며 국정관리의 책임과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굳건한 안보태세와 차질 없는 외교정책 수행, 경제 비상대응을 다짐한 것은 국민을 안심시키는 적절한 조치다. 탄핵안 표결 전 내각 총사퇴를 주장했던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정 공백의 신속한 보완을 위해 ‘국회·정부정책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것도 고무적이다. 그러나 김동철 국민의당 비대위원장은 황 권한대행의 자진 퇴진을 요구해 야당끼리도 엇박자를 보였다. 이제는 국정의 안정이 우선이다. 지금부터 여야가 할 일은 황 권한대행이 안보와 외교, 경제, 민생을 탄탄히 챙길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고 협치(協治)를 하는 것이다.
평화적이고도 절제된 촛불혁명이 탄핵안 국회 의결을 이끌어냈지만 국회가 언제까지나 촛불에 의존해서는 위험하다. 광장의 민의가 제기하는 문제를 헌정질서 안에서 풀어내는 것이 정당과 국회의 할 일이다. 특히 차기 대권이 목전에 다가왔다고 믿는 야당의 대선 주자들이 지금까지 집행돼 온 정당한 정부의 정책을 뒤집거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번복 등 안보와 체제를 뒤흔드는 주장을 밀어붙인다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촛불혁명에서 드러났듯이 국민은 오히려 정치인들보다 나라를 더 많이 걱정한다. 지금같이 혼란한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안정시키고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 깊이 생각하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임을 잊어선 안 된다.
앞으로는 국회가 통치의 중심이 돼야 하지만 과연 기대를 걸 수 있을지 솔직히 믿음이 가지 않는다. 평소에도 국회는 국정의 발목을 잡는 데만 유능했다. 최순실 일당의 국정 농단을 막지 못한 데는 국회가 감시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책임도 크다. 이번 사태가 백일하에 드러난 것도 언론 취재 덕이고, 박 대통령의 업무를 정지시킨 것도 촛불혁명의 힘이지 정치권이 한 일은 별로 없다. 탄핵까지 가기 전에 책임총리 임명이나 거국중립내각 구성,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에도 정치권이 합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함으로써 되레 무질서하게 상황을 악화시켰을 뿐이다.
지금 수많은 젊은이들이 나라에 희망이 없다며 “헬조선”을 외치는 실정이다. 대통령 한 사람이 최순실한테 놀아나고 국정을 잘못 이끌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회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여야 정치인들이 대한민국을 희망이 넘치는 나라로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밤새워 토론한 끝에 답을 정책으로 구현해낸 적이 있는가. 국회의원들이 누리고 있는 특권과 반칙은 최 씨가 대통령 권한을 등에 업고 이권을 챙기는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자신의 금배지보다 나라와 국민을 더 중하게 여기는 국회의원이 몇이나 되는지 국민이 묻고 있다.
집권여당인 새누리당의 책임이 특히 무겁다. 박 대통령의 불통과 오만, 비정상적 국정 운영에 직언하고 바로잡기는커녕 대통령 뒤에서 권력을 향유하면서 끝까지 탄핵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쓴 친박(친박근혜)은 석고대죄해야 마땅하다. 4·13총선에서 혹독한 심판을 받고도 새누리당은 반성은커녕 친박, 비박으로 갈려 싸움질하기에 바빴다. 이번에 탄핵에 당당히 찬성표를 던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건강한 보수세력이 다시 태어나지 못한다면 새누리당은 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가는 것을 멀거니 서서 구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야당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촛불 민심이 박 대통령의 탄핵소추까지 이끌어낼 동안 촛불 근처에서 곁불을 쬔 것 말고 실제 야당이 한 일이 무엇인가. 이제라도 국회가 나서서 한 번만이라도 좋은 정치로 국민에게 믿음과 희망을 주어야 한다. 국회가 답을 제시하지 못하면 국민은 당신들도 기득권 집단과 다름없다며 심판에 나설 것이다.
헌재, 국가 바로 세울 결정 신속히 내려야
이제 박 대통령이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경우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탄핵 찬반으로 갈린 민심이 다시 촛불시위로 헌재 압박에 나설 것이 우려되지만 헌법과 법을 위반한 잘못을 바로잡겠다면서 또 다른 헌법 위반과 불법 행위를 저지르는 것은 민주주의를 훼손하는 일이다. 법치주의에 입각한 성숙한 민주주의, 공정한 대한민국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거리의 정치를 국회가 완성해내야 한다.
헌재는 최장 6개월까지 끌 것이 아니라 집중심리를 통해 조속한 결론을 내기 바란다. 대선 준비에 들어갈 정치권은 경선과 후보 검증, 선거운동에 이르기까지 투명하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불행한 대통령’을 만들어내는 5년 단임제 중심의 87년 체제를 넘어 정치 경제 사회를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새로운 도약을 도모할 수 있는 개헌 논의도 불가피할 것이다. 야당과 일부 대선 주자들이 정권을 다 잡은 것처럼 개헌 논의조차 거부하는 것은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단견이자 국가 개조와 발전을 가로막는 욕심이다.
박 대통령은 탄핵안 가결 직후 소집한 국무위원 간담회에서 헌재의 탄핵 심판과 특검의 수사에 차분하고 담담한 마음가짐으로 대응해 나갈 것을 밝혔다. 어떻게 대통령직을 마무리하는 것이 진정 나라와 국민을 위한 길인지 박 대통령이 깊이 숙고해주기 바란다. 박 대통령 탄핵이 빚은 국정 공백과 혼란을 나라와 국민이 한 단계 성숙한 민주주의로 발전시키는 것이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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