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박(비박근혜)계가 뭉치기 시작했다. 이 또한 최순실 덕분이다. 비박계가 비상시국회의를 결성한 시점이 11월 13일이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2월 9일, 그들은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 나섰고, 44명으로 세력을 불리는 데 성공했다. 11월 4일만 해도 29명이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비상시국회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12월 13일 발전적 해체를 선언했다. 외연을 확대한 새로운 모임을 결성하겠다는 것이 목표다.
비박계 결집에 놀란 친박(친박근혜)계도 11월 13일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이라는 모임을 출범했다. 11일 심야회동에 참석한 친박계는 모두 50명이었다. 하지만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 발기인 명단에 이름은 올린 친박계는 36명에 불과했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박 대통령 지지율이 바닥을 치는 속에서 동요하는 친박계가 늘고 있다는 방증이다. 어찌됐건 이제 친박계와 비박계는 한 지붕 두 가족이 됐고, 각자 유력한 대권주자를 내세워 주도권을 잡아나가야 할 시점이다.
조율사형 반기문
친박계는 여전히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기대를 거는 눈치다. 그동안 들인 공이 아까워서라도 지금 포기하기엔 아쉬울 것이다. 그런데 방법이 마땅치 않다. 오직 한 길, 비박계와 대타협하는 것밖에 없다. 반 총장을 비박계 대권주자로 양보하는 길이다. 비박계도 환영하는 바다. 누구보다 대통령선거(대선) 불출마 선언을 한 새누리당 김무성 전 대표가 적극적이다. 얼마 전 MBC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반기문 총장도 아주 훌륭한 분이고, 자기 정체성에 맞는 정치세력에 들어와 당당하게 경선에 응하고….” 그래서 비박계가 당 혁신을 마친 뒤 반 총장과 연대하는 방향으로 갈 개연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도 얼마 전 KBS와 인터뷰에서 반 총장이 비박계 대선주자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경선이다. 김 전 대표가 언급했듯이 비박계 대선주자들은 반 총장에게 경선을 치르자고 들 것이다. 당내 조직 기반이 취약한 반 총장에게 이는 백기투항하라는 요구와 다르지 않다. 빛나는 지지율에도 새누리당 경선 흥행에 도움만 되고 끝나버린다면 반 총장 처지에서는 허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비박계는 그에게 경선 통과를 보장해줘야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코너에 몰린 친박계와 달리 비박계에게는 그나마 기회가 조금은 열려 있기 때문이다.
반 총장은 최근 제3지대 보수 신당 창당에 좀 더 비중을 두는 모습이다. 그런 점에서 또 다른 가능성은 탈당한 비박계가 보수 신당에 합류하는 것이다. 이때 비박계의 합류는 개별 입당 형태가 될 테고, 선택권과 주도권은 반 총장이 갖게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비박계는 이 시나리오를 가장 마지막 카드로 고려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새누리당을 선점한 상태에서 반 총장을 받아들이는 편이 선택권과 주도권을 쥐는 데 유리하기 때문에 친박계를 설득 또는 굴복시킨 뒤, 반 총장 영입을 먼저 시도할 것으로 보이기는 한다. 결국 경선이 문제다.
선비형 유승민
비상시국회의가 새누리당 내 탄핵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가장 앞장선 인물은 유승민 전 원내대표다. 사실 탄핵정국에서 비상시국회의도 수시로 흔들렸다. 박 대통령과 친박계의 설득 공세가 거셌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과 친박계는 비박계가 먼저 요구해 당론으로 채택한 ‘4월 하야-6월 대선’ 카드를 매개로 때론 회유하기도, 때론 협박하기도 했다. 이정현 대표는 탄핵소추안 표결에 들어가면 대표 사퇴 약속마저 지킬 수 없다고 배수진을 쳤다. 그래서 비박계가 흔들릴 때 유 전 원내대표는 야당과 협상이 불발되더라도 탄핵소추안 표결에는 참여한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비박계를 독려했다.
그래서 비박계 탈당의 키맨도 결국 유 전 원내대표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유 전 원내대표는 이 부분에서도 단호하다. 비공개 회의에서 이렇게 언급했다고 한다. “이정현 대표가 매번 28만 당원을 얘기하는데, 우리야말로 28만 당원을 저들에게 맡겨두고 갈 수 없다.” 공개적으로도 그는 “당 안에서 당의 개혁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 말이 빈말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지금까지 행보가 잘 보여준다.
돌이켜보니 박 대통령과 대통령비서실 비서진을 분노케 했다는 그의 ‘청와대 얼라’ 발언도 맞는 말이었다. 원내대표에서 밀려날 때 그는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를 강조했다. 지난 총선 당시 새누리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할 때 그는 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를 강조했다. 촛불집회로 국민주권 시대가 열릴 것을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한 발언이다. 그렇다고 그가 도사는 아니다. 다만 원칙과 명분에 충실할 뿐이다.
반듯한 선비를 연상케 하는 그의 행보에 대한 대중적 열기는 아직 미지근하다. 보수세력이 본격적으로 그를 대안으로 밀어올릴지도 아직은 미지수다. 지난 총선 당시 대구지역 유권자가 보여준 관심으로 미뤄보면 잠재력은 충분한 듯하다. 박 대통령과 새누리당을 지지하던 보수세력은 현재 부동층으로 변했다. 관망세를 유지하면서 친박계와 비박계의 결투를 지켜보고 있다. 이 결투가 비박계의 승리로 끝나고 흡족할 만한 혁신이 이뤄진다면 그들은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지지해야 할 대선주자로 유 전 원내대표를 가장 먼저 고려할 개연성이 높다.
김무성 전 대표의 지지도 그에게는 유리한 변수다. 김 전 대표는 4월 총선 당시 그를 위해 ‘옥새 들고 나르샤’까지 연출했던 바다. 이번 탄핵국면에서도 두 사람의 팀플레이가 주효했다. 김 전 대표가 골키퍼였다면, 유 전 원내대표는 스트라이커였다. 그래서 친박계도 최근 두 사람만 꼭 짚어 출당시키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수적인 면에서도 친박계를 앞서기 시작한 비박계의 중추다. 앞으로도 두 사람의 역할분담은 이어질 것이다. 중간에 생각을 바꿔 대선 출마로 회귀하지 않는 한, 김 전 대표는 조직 면에서도 유 전 원내대표를 지원할 가능성이 높다.
보스형 김무성
김무성 전 대표의 풍모는 영락없는 보스다. 실제로 그의 친화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원조 친박계에서 밀려난 그이지만, 친박계 내에서도 그를 형님으로 따르는 이가 많다. 바로 ‘월박’이다. 최근 비상시국회의 대변인 격인 황영철 의원은 친박 핵심 8인의 탈당을 요구했다. 이른바 ‘친박 8적’이다. 황 의원이 앞서긴 했지만 사실 배후에는 김 전 대표가 있다고 봐야 한다. 김 전 대표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친박의 내부 분열이다.
친박계를 향해 8적만 탈당하면 나머지는 모두 함께 갈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공개적으로는 8적의 탈당을 요구하면서, 수면 아래서는 나머지 친박계에게 개별적으로 연락해 합류를 설득했을 터다. 친박계 ‘혁신과 통합 보수연합’ 모임의 수가 늘지 않는 데는 이런 김 전 대표의 공작이 상당히 작용했을 것이다. 사실 친박계라고 하지만 핵심 친박 인사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친박계는 이 정부 내내 찬밥 신세였다. 변두리 친박은 친박도 아니었던 것이다. 최순실보다 못한 허울뿐인 친박계였던 셈이다. 이들로서는 김 전 대표의 공작이 차라리 반갑기조차 할 것이다.
친박계 이삭줍기는 그래서 성공 가능성이 높다. 이미 세가 기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친박 8적도 고민이 많을 것이다. 차라리 김 전 대표에게 투항하고 미래를 약속받고 싶은 심정도 없지 않을 테다. 왜? 김 전 대표라면 이면합의도 허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보스가 달리 보스인가. 통 크게 수용하니까 보스지. 그런 점에서 일시 귀양살이를 전제로 친박 8적이 탈당을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친박 8적의 탈당까지 관철하면 당내에서 김 전 대표의 입지는 한결 탄탄해진다. 친박계까지 거느리는 사실상 최대 계파 수장이 되는 것이다. 유 전 원내대표조차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슈퍼파워’다. 이 힘이면 솔직히 유 전 원내대표도 밀어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경박단소(輕薄短小)’ 전략을 쓰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개헌을 매개로 반기문 대통령-김무성 총리, 또는 김무성 대통령-유승민 총리 구도를 그려보는 것은 가능하다. 그래서 친박계를 정리한 후 그는 빠른 속도로 개헌으로 향해갈 것이다.
승부사형 김용태
한국에는 도널드 트럼프 같은 인물이 없을까. 보수진영에는 이재명 성남시장 같은 인물이 없을까. 사이다 발언을 쏟아낼 인물이 없을까. 있다. 일찌감치 탈당을 선언한 김용태 의원이다. 최순실 게이트 이후 새누리당 내에서는 친박계, 비박계를 불문하고 뼛속까지 바꿔야 산다는 얘기가 나온다. 5월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선임된 직후 김 의원이 이미 한 말이다. 그 당시 김 의원은 “이번을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뼛속까지 모든 것을 바꾸는 혁신을 해나가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 모든 포부는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장렬한 전사는 갑신정변을 일으킨 김옥균을 연상케 한다.
이후에도 그는 친박계를 향해 쓴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돈키호테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선도 탈당했다. 그는 새누리당을 해체하라고 거침없이 주장한다. 박 대통령에게 명예로운 퇴진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도 강조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하늘이 두 쪽 나도 정기국회 내 탄핵을 의결하고 헌법과 법률에 의거해 그 일파들을 단죄해야 한다.’ 11월 29일 그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발언 강도로 보면 이재명 시장을 능가한다. 그런데 뜨질 못한다. 대중이 아직 그를 잘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면 단숨에 뜰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본다. 더욱이 그는 대전 출신이다. 이른바 충청권이다. 그런데 고향이 아닌, 새누리당 열세지역인 서울 양천을 지역구에서 내리 3선이다. 4월 총선 때 수도권에서 새누리당 후보가 줄줄이 낙선하는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가 한국의 트럼프가 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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