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노동자가 일한다는 카타르 도하 근처 산업단지 인더스트리얼 에어리어의 한 조립식 건물 제작공장. 경비원이 영어로 고함치며 공장 안으로 들어서려는 기자를 막았다. 다른 공장보다 통제 수위가 훨씬 높았다. 의아해하는 기자에게 이종설 카타르한인상공인협의회장은 “북한인들이 공장 내부 숙소에서 밀주를 만들어 파는데 뇌물을 받은 경비가 외부인 접근을 차단해 주고 있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 공장에서 숙식하는 북한 노동자들은 지난해 말 밀주를 만들어 팔다가 현지 경찰에 적발돼 강제 추방됐다. 하지만 일명 ‘싸대기’(sadiki·아랍어로 ‘나의 친구’)로 불리는 북한 밀주는 허가증이 없으면 술을 살 수 없는 카타르의 은밀한 음주 수요와 외화벌이에 혈안이 된 북한의 욕망이 맞물려 암세포처럼 번지고 있다.
술이 금지된 이슬람 국가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불법 밀주 제조 현장에 내몰리는 건 돈줄이 말라가는 김정은의 통치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곳에서 북한 노동자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2014년 한 해에만 밀주 판매로 1200만 달러(약 143억 원)를 벌어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합법적인 건설노동자 임금으로 벌어들인 수입 800만 달러의 1.5배에 해당하는 돈이다. 카타르가 5월 북한 노동자에 대한 신규 비자 발급을 중단하면서 노동자들은 밀주 제조에 사활을 걸게 됐다.
충성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불법 밀주 제조로 내몰리는 북한 노동자들은 하루하루가 괴로운 처지다. 북한은 지난해 10월 카타르 주재 노동자들이 밀주를 만들다 적발됐다는 보도가 이어지자 밀주 제조를 중단하라고 지시했다. 올해 3월에는 밀주 제조 실태를 감시한다며 국가안전보위부 검열단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검열단은 뇌물을 받고 밀주 제조를 눈감아준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밀주 없이는 충성자금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카타르 주재 북한 건설회사들은 한때 잠시 줄였던 밀주 제조를 올해 9월부터 대폭 늘리고 있다.
○ 2층 단독주택 통째 빌려 24시간 밀주 생산
북한 건설사들은 회사마다 카타르 외곽에 2층짜리 단독주택 여러 채를 통째로 빌려 24시간 내내 밀주제조 공장으로 가동하고 있다. 5개 건설사 산하 35개 사업소에도 주방 등에 제조시설을 몰래 만들어 놓고 밀주를 생산해 낸다. 제조 과정에서의 악취를 숨기기 위해 공장은 사방이 한적한 곳을 고른다.
단독주택을 빌려 24시간 가동하는 밀주공장에서는 한 곳당 매일 1080L가량의 밀주를 생산한다. 1.5L짜리 페트병 12개를 한 박스로 묶어서 파니 매일 60박스씩 만드는 셈이다. 35개 사업소에서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밀주 시설에서는 한 곳당 대략 매일 324L, 즉 18박스씩 만들어낸다. 밀주 가격은 알코올 농도가 높은 것은 한 박스에 400리얄(약 14만 원), 물이 많이 섞인 건 200리얄(약 7만 원) 정도로 카타르의 초고가 물가를 고려하면 싼 편이다.
북한 밀주는 물과 설탕, 효모균 가루를 이용해 만든다. 기자가 북한 밀주를 구해 직접 마셔 보니 싸구려 백주(白酒) 같은 맛이 났다. 소주잔으로 한 잔을 마셔도 머리가 아찔할 만큼 도수가 높았다. 조악한 시설에서 만들다 보니 물에 알코올 성분이 깊게 배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북한 밀주는 북한 노동자와 인도 스리랑카 등 비(非)이슬람 국가에서 온 150만 외국인 노동자가 주 수요층이다. 독주를 선호하는 일부 북한 노동자는 밀주 대신 약국에서 의료용 알코올을 사서 물에 타 마시기도 한다. 카타르 도하 인근 건설현장에서 만난 북한 노동자 A 씨는 “‘사탕가루 술’은 (도수가) 약해서 잘 안 마신다”며 “약국에서 L당 60리얄(약 2만 원)에 파는 의료용 알코올을 사다가 물을 1 대 1 비율로 타서 마신다”고 말했다.
○ 노동자들 “걸리면 추방되지만 막노동보다 낫다”
북한 노동자들은 밀주를 만들다 적발되면 바로 강제 추방된다. 추방당한 동료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 노동자들은 북한 건설사 간부들에게 뇌물로 3000∼4000달러를 바치기로 약속하면서까지 밀주 제조책을 지원한다. 밀주 수익 대부분을 간부들이 챙긴다지만 월 150∼200달러에 그치는 공사장 일보단 수입이 많다고 한다.
밀주가 돈이 되다 보니 중동 주재 북한 외교관들까지 나서 면책특권을 악용해 밀주를 판매한다. 쿠웨이트에 주재하는 한 북한 외교관은 올해 외교차량을 검문검색하지 않는 점을 노려 차량에 가짜 양주를 한 박스 싣고 육로를 통해 카타르로 들어와 팔았다.
지난해 북한으로 돌아간 1건설(수도건설) 사장은 노동자 임금 착취와 밀주 수입으로 100만 달러를 챙겼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한창 때는 건설사 1곳당 밀주 제조용 단독주택 공장 5∼10곳을 운영해 왔다. 하지만 최근엔 카타르 당국의 단속이 강화됐다.
북한의 불법 밀주사업이 합법적인 노동 임금을 뛰어넘는 김정은 체제의 수익원으로 부상하면서 밀주 산업을 뿌리 뽑아야 실질적인 대북제재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종설 회장은 “북한의 노동자 송출 자체를 중단시키지 않는 한 김정은 정권을 배불리는 밀주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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