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2월 29일 오랫동안 북한 외교의 최일선에서 활동했던 태영호 전 주영 북한대사관 공사와의 대담은 북한을 나름대로 잘 안다고 여겼던 기자에게도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다. 익숙한 답변이 나오는 듯하다가도 불쑥 새로운 관점들이 튀어나왔다. 가령 태 전 공사가 김정은이 핵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를 유고슬라비아 사태를 놓고 설명한 것은 이라크나 리비아 사례만 놓고 분석했던 한국의 학계에도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줄 듯했다. 역시 생존을 매일 고민하고 사는 당사자(북한)가 보는 관점은 외부의 짐작과는 크게 달랐다. 그가 설명한 북한 의사 결정 시스템도 북한의 정책을 읽는 데 새로운 시각을 던져줄 것으로 보인다. 》
―김정은은 10조 달러를 줘도 핵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 김정은은 핵무장화로 갈 수밖에 없다. 이 세상 모든 독재자들의 심리는 같다고 생각한다. 외부에서 쳐들어오거나 내부에서 반대해 들고일어날 것을 걱정한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것을 막는 것은 전적으로 김정은이 해야 할 영역이다. 하지만 외부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막는 것은 쉽지 않다. 미국이 외과수술식 타격을 한다고 하면 막을 수단이 마땅히 없다.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등 독재 정권들은 내부 반란이 아니라 외부의 군사적 공격으로 허물어졌다. 후세인이 미국에 잡혀 교수형 당하는 것을 보는 김정은의 생각과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 같았겠나. 김정은은 후세인을 보며 나도 어느 순간 미국이 저렇게 내 목에 밧줄을 걸 날이 오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당연히 생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나 미국이 과연 북한을 침공할까.
“한국에 오니 많은 전문가들이 한미 양국이 북한과 전쟁을 벌이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가령 ‘북한은 자꾸 미국과 한국이 북한을 치려 군사훈련을 한다는데 그건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정당화하려는 논리’라고 한다. 그러나 북한의 시각에서 보면 틀린 말이다. 가령 북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고 가정해보자. 김정은이 군대를 동원해 폭동을 진짜 무자비하게 진압하면 미국과 한국 언론은 어떤 반응일까. ‘동포 몇 만을 밀어 죽이는데 우리가 가만있을 수 있는가’라고 하지 않을까. 여론의 힘은 무섭다. 미국은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개입하지 않다가 결국 폭격에 나섰다. 김정은은 바로 그런 것이 무서운 것이다. 북한 위기를 진압하는데 여론의 힘에 눌려 미국이나 한국이 혹시 치고 들어오지 않을까라고 걱정하는 것이다. 이럴 때 핵무기가 있으면 절대 못 들어온다는 게 김정은의 생각이다.”
―핵문제는 어떻게 풀었으면 좋겠나.
“김정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통일해야 한다. 21세기에 다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서도 안 된다. 평화적으로 통일하는 유일한 방법은 북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계몽시켜서 내부 봉기를 일으키는 것뿐이다. 100%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우선 북한 주민의 마음속에서 수령에 대한 신격화라는 기둥을 허물어야 한다. 그러자면 김 씨 일가의 허구성을 대북 전단과 드론 등 각종 수단을 모두 동원해 꾸준히 북한 주민에게 알려야 한다. 둘째는 김정은 주위에 있는 북한 집권층에게 김정은을 버리고 같이 통일을 하는 것이 그들의 미래를 담보해주는 길이라는 걸 뚜렷하게 알려야 한다. 북한 집권층은 정치적 보복에 따른 희생을 두려워한다.”
―북한 체제를 붕괴시키는 최선이 내부 봉기인가.
“암살이나 군사쿠데타는 현재 북한 구조상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변하고 민심이 변하기 때문에 내부 봉기는 가능하다고 본다. 주민들과 군중을 일으켜 세우는 것은 돈의 위력으로 가능하다.”
―김정은이 개혁 개방할 가능성은 없나.
“김정은이 등장했을 때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도 김정은이 젊고 해외에서 공부해 세상물정을 아니 달라질 것으로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이제야 김정은이 아니라 김여정이나 김정철이 그 자리에 올라갔다 해도 그 길밖에 갈 수 없는 3대 세습의 속성을 알았다. 북한이 발전하려면 시장경제를 해야 하는데, 시장경제의 핵심은 자유다. 자본과 사람의 이동이 자유로워야 하고, 경제인의 결정이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북한은 그렇게 하면 주민 통제 시스템이 허물어지고, 외부에서 정보가 들어온다. 김정은이 북한 경제 살리는 방향으로 나갈까 아니면 장기집권으로 나갈까. 그러니 옵션이 없는 것이고 참 안타깝다.”
―김정은의 통치 방식의 핵심은.
“정보 차단이다. 북한 사회는 사람들의 사고를 철저히 통제해야 유지되는 사회다. 오직 수령과 당이 말하는 말만 들어가야 그 사람 사고에서 비교 개념도 없어지고 양처럼 된다. 간부들이 볼 수 있는 자료도 등급화돼 있다. 중앙기관 국장급 이상은 ‘자료통신’ ‘참고통신’을 보고. 중앙당은 부장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참고신문’을 본다. 아무리 중앙당 간부라도 외국 정보를 볼 수 없다.”
―영국 핵잠수함 자료를 훔쳐오라는 지시를 이행하지 못해 탈북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사실이 아니다. 북한은 해외 공관원들이 나라의 국방력 발전을 위해 해당국 최신 과학기술과 국방기술을 뽑아야 한다고 시킨다. 이걸 ‘융성자료’ 수집이라고 한다. 영국은 핵잠수함과 항공모함을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이니 당연히 그게 관심이다. 하지만 얻어내면 표창을 받지만 못 빼왔다고 처벌하진 않는다. 나는 시도하지도 않았다. 영국 MI5(영국 정보청 보안부) 이런 애들이 장난이에요?(웃음)”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 같은 소식은 외교 공관에도 알려주나.
“전혀 알려주지 않는다. 대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누구 처형됐냐고 물어보면 내정간섭 하지 말라, 우리가 누굴 죽이든 살리든 너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대답한다.”
―북한과 한국 외교의 장단점 뭐라고 생각하나.
“비교하기 어렵다. 북한 외교는 여론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러니 벼랑끝 전술로 같이 죽자는 심산으로 밀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등 자유 민주주의 체제에선 국가 정책이 여론에 좌우된다. 외교관 견지에서 보면 한국 외교가 최근 좋아졌다고 본다. 미국과 일본에 편중됐다가 최근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다. 대북제재 끌어내고 인권 문제에서 북한을 수세에 몰아넣은 것은 한국 외교가 달성한 아주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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