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부형권]노무현의 부산 vs 반기문의 평양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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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형권 뉴욕특파원
부형권 뉴욕특파원
  ‘당신은 시작부터 바보였습니다/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지면서도/정직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다고/웅크린 아이들의 가슴에 별을 심어주던 사람’

 시인 박노해의 시는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이렇게 추모했다. 지역주의 타파, 국민 통합이란 정치적 명분을 내걸고 무모한 도전을 계속하면서 얻은 별명이 ‘바보’였다. 1988년 13대 총선 때 부산에서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 후보로 당선됐지만 3당 합당(1990년)을 거부하며 YS와 결별했다. 대세(大勢) 대신 대의(大義)를 따르는 특유의 ‘바보짓’이 본격화됐다. 이른바 ‘호남당의 영남 후보’로 1992년 14대 총선, 1995년 부산시장 선거, 2000년 16대 총선에서 부산에 도전했으나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그는 왜 바보 같은 도전을 계속한 걸까. 승부사이기 때문이다. 2002년 대선 기간 그를 지근거리에서 취재했던 기자의 판단이다. 같은 해 1월 그에게 “당신을 정치계에 입문시킨 YS로부터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직관과 결단이다. 내가 부산에 계속 내려가서 승부수를 던지는 것도 내 타고난 성격도 있지만 YS가 던져 온 정치적 승부수에서 배운 측면이 많다. 승부수가 정치인의 운명을 가른다.”

 3당 합당이 YS의 승부수였다면, 부산 도전은 노무현의 승부수였다. 차이는 YS는 민의(民意)에 반하는 합당에 성공해 대세를 만들었지만, 노 전 대통령은 부산에서 계속 실패했지만 국민적 공감을 얻는 데는 성공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대통령외교보좌관,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내고 정부의 전폭적 지원 아래 유엔 사무총장 도전에 성공했던 반기문 전 총장(72)이 이달 중순 귀국한다. 2006년 사무총장 당선자로 미국 뉴욕으로 떠났던 그가 10년 만에 유력한 대권주자로 돌아온다.

 반 전 총장이 자신보다 2년 연하지만, 정치는 선배인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반 전 총장의 승부처는 평양이었다.

 “특히 제가 직접 관여해 왔던 북한 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 유지에 대해서는 사무총장의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여 조속한 시일 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기여하고자 합니다.”(2006년 11월 국회 연설에서)

 반 전 총장은 이 약속의 이행 여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받았고 그때마다 “북한(평양) 방문을 포함해 모든 역할을 다하겠다”고 대답하곤 했다. 그러나 국내 언론이 ‘방북설’을 보도할 때마다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임기 막판에야 개성공단과 평양 방문을 시도했지만 이 역시 좌절됐다. 그 책임은 “북측의 일방적 취소 때문”이라며 북한으로 돌렸다. 근면과 성실의 대명사인 반 전 총장은 유엔 193개 회원국 중 작은 섬나라와 오지(奧地) 국가를 뺀 154개국(79.8%)을 방문했다. 북극(3회)과 남극(1회)도 다녀왔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출신 쿠르트 발트하임 총장(1979년 방북)과 이집트 출신 부트로스 부트로스갈리 총장(1993년 방북)도 다녀온 평양 땅을 끝내 밟지 못하고 10년 임기를 마쳤다. 반 전 총장은 스스로 ‘평생 배신을 모르고 살았다’(지난해 12월 20일 기자회견)고 했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를 위한 한국인 총장의 실질적 기여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배신감이나 큰 실망감을 줬다.

 반 전 총장이나 그의 외교관 출신 측근들의 해명처럼 방북 불발은 전적으로 북한의 잘못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평양 실패’가 노 전 대통령의 ‘부산 실패’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 실패에선 어떤 감동이나 공감도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부형권 뉴욕특파원 bookum90@donga.com
#반기문#노무현#평양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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