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 800여 편 가운데 뜻하지 않게 가장 널리 읽히는 작품이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시해된 해에 나온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이다. 이 시는 4·19 세대의 만가인데, 같은 맥락에서 발표한 시가 ‘부끄러운 월요일’이다. ‘1987.4.13.’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다음과 같다.
‘온 나라가 일손을 멈추고/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날/마침 중간시험이 시작되던 월요일/안경을 쓰고/넥타이를 매고/교단에 선 나 자신이/부끄럽고/창피해서/커닝하는 학생들을/잡아낼 수가 없었다/그들과/나와/그/누가 정말로 부정행위를 하고 있는지/가려낼 수가 없었다/어느 한 사람인가/우리 모두인가/아니면 온 나라인가’
여기 등장하는 ‘한 사람’은 당시 신군부 대통령이었다. 민주적 선거에 의한 정권 교체를 또다시 무산시키려는 이 ‘부끄럽고/창피’한 조치에 항거하여 이른바 386세대의 민주항쟁이 일어났고, 1987년 6·29선언 결과 노태우 정권이 들어섰다. 당시 민주화 기치를 높이 들었던 야권의 김영삼 김대중 두 대통령 후보가 극한투쟁을 벌이다가 군부 세력에 또다시 정권을 내어주게 되었던 것이다. 20세기 말에야 겨우 민간정부가 들어섰는데, 그때는 대통령의 아들들이 번갈아 국정을 농단했고 그 뒤로는 대통령의 형들이 국사에 관여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이것이 모두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려니 생각하고 국민은 참고 또 참아왔다.
그러다가 2012년 박근혜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사람들은 미국 사회도 아직 배출한 전례가 없는 여성 대통령이 한국에서 나왔다고 평했다. 지지자들은 박 대통령이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으니 적어도 친인척에 의한 국정 농단 같은 부정과 비리는 없으리라는 안도와 기대를 드러냈다. 그러나 임기 만료를 1년여 앞두고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다. 이 사건의 나무는 그야말로 뿌리가 너무 깊고 줄기가 국내는 물론 동서양으로 널리 퍼져 있어서 매일매일 기이한 새 열매가 매달리며 온 국민과 전 세계를 경악시키고 있다.
신문 지면과 방송 매체 화면이 온통 이 부끄러운 소문으로 가득 차고, 서울의 심장부와 전국 대도시 중심가에서 주말마다 수백만 인파가 촛불 시위를 벌이고 있다. 10주 전부터 시작된 평화적인 촛불 시위와 함께 한국 민주주의가 크게 발전한 것으로 속단하고, 성형 한류에 이어 촛불 한류도 세계로 퍼져 나갈 것이라고 낙관하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국회에서는 청문회가 열리고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되었다. 특검과 헌법소추가 진행 중이고, 여당은 자중지란으로 분열되었다. 정치인들은 정권교체와 개헌을 앞세워 동상이몽과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에 걸쳐 왜란과 호란으로 국토를 유린당하면서도 당시의 사대부 관료들이 국가의 안위와 민생을 외면하고, 오직 당쟁에만 골몰했던 역사가 반복되는 것 아닌가 불안하다. 모두들 염불보다 잿밥에만 마음이 있어 보인다. 보다 못한 국민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이게 도대체 나라냐”고 울부짖고 있다.
새해는 정유년, 닭의 해이다. 원대한 소망을 품기는 힘들지만 조류인플루엔자를 조속히 퇴치하여 서민들이 달걀 반찬이라도 마음 놓고 밥상에 올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올바른 지도자를 세우지 못한 못난 유권자로서 조금 더 욕심내는 것이 허락된다면, 새해에는 제발 정치지도자로서 요건을 갖춘 현명한 대통령이 선출되어 나의 시에 다시는 대통령이 등장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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