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김정은의 반성문 정치와 신년사의 자아비판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1월 12일 03시 00분


올해 신년사를 발표하던 김정은은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며 갑자기 머리 숙여 사과했다.
올해 신년사를 발표하던 김정은은 “능력이 따라주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며 갑자기 머리 숙여 사과했다.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2013년 초 조선인민군출판사 편집부장이 체포됐다. 불평불만을 내세우며 태업하는 등 출판사를 잘 이끌지 못했다는 죄였다. 군인들을 불평하지 못하도록 세뇌해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남보다 더 많이 불평했으니 문제가 크다고 본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 편집부장은 “죄를 용서해 주라”는 김정은의 지시를 받고 석방됐다. 4월부터 북한 전역에서 이 일을 김정은의 위대한 은덕이라고 선전하는 강연회가 열렸다. 강연회에서 전달된 내용은 이렇다.

 “원수님(김정은)께서는 그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읽으시고 ‘그가 지금 한순간 잘못했어도 과거 당을 위해 공을 세운 것이 없겠나. 그의 경력 자료를 다 가져오라’고 했다. 그가 병사 생활을 잘했다는 자료를 보시곤 ‘반성문도 진심으로 솔직히 쓴 것 같으니 99% 잘못했어도 과거 1%라도 잘한 것 있으면 용서해 주자’고 하셨다.”

 자칫 정치범으로 낙인찍혀 가족과 함께 사라질 운명에 처했던 편집부장은 그렇게 김정은의 인간미를 전하는 표본이 돼 살아남게 됐다.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북한에서 사람들에게 시도 때도 없이 반성문을 쓰라는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그전까지 북한에서도 반성문은 명백히 잘못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만 썼다. 그러나 편집부장 사건이 있은 뒤부터는 노인들까지 1년에 최소 한 차례 이상 반성문을 쓰게 했다. 간부나 해외 파견자들은 훨씬 자주 써야 했다. ‘북한 통치의 10계명’이나 다름없는 ‘당의 유일적 영도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60개 조항별로 위반 사실을 따져서 최소 10장 이상 써야 했고, 다 쓰기 전엔 집에도 보내지 않는다. 이런 위협적인 말도 꼭 따른다.

 “솔직히 고백을 하면 과거 잘못은 다 용서가 되지만 반성문에 쓰지 않은 잘못이 드러나면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내가 당신을 봐주려면 솔직히 써야 한다.”

 북한은 급격히 불신 사회로 빠져들었다. 친한 몇 명이 모여서 한 일이나 발언이 누구의 반성문에 올라갈지 모르는 일이 됐기 때문이다.

 반성문 바람이 불기 5개월 전인 2012년 12월 김정은은 “어디서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모두 파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반성문 쓰기는 동향 파악은 물론이고 불평불만을 막고 공포 분위기를 만드는 데도 매우 효과적이었다.

 이런 시스템은 김정일의 통치방식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었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내정된 1970년대에 ‘전국 일일 직보체계’와 ‘생활총화제도’를 만들어 북한을 틀어쥐었다. 일일 직보체계는 당 조직과 국가보위성, 인민보안성이 해당 지역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각자의 라인을 통해 매일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보고하는 시스템이다. 이런 시스템에선 어떤 사건을 숨길 수가 없다. 가령 당에서 일부러 누락시킨 보고가 보위성을 통해 전달되면 처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방식으로 김정일은 전국을 파악해 장악했고 지금도 이런 시스템은 그대로 유지된다. 김정은은 여기에 더해 반성문으로 개인별 약점까지 틀어쥐려 하는 것이다.

 반성문은 생활총화의 ‘약점’도 보완했다. 생활총화는 대중 앞에서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하는 것인데 함부로 말해 상대에게 해를 입히면 소속 집단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그래서 남의 결함을 비판할 때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다. 반면 반성문은 몰래 고자질하는 것이기 때문에 양심적 죄책감조차 무디게 만든다. 세계에서 가장 정보화에 뒤처진 북한이 김정은 시대에 와서 역설적으로 최악의 ‘빅브러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일본 도쿄신문은 북한 내부 관계자를 인용해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보도했다. 지난해 9월 김정은이 만취한 상태로 군 원로를 모아 놓고 “너희가 군사위성 하나 못 만든 것은 반역죄와 같다”고 고함을 치며 밤새 반성문을 쓰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난 김정은은 반성문을 들고 서 있는 군 원로들을 보고는 “왜 모여 있는가. 다들 나이도 많고 하니 더 건강에 신경을 써라”고 말했다. 숙청의 공포에 시달리며 밤새 반성문을 썼던 군 원로들은 긴장감이 풀어져 소리 내 눈물을 흘렸다는 내용이다.

 일본발 북한 기사들은 사실 신빙성을 신중히 따져봐야 하지만 김정은의 ‘반성문 사랑’을 감안할 때 이 보도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김정은이 올 신년사에서 자아반성을 하면서 머리를 숙이는 장면을 보며 북한 간부들과 주민은 섬뜩했을 것 같다.

 앞으론 “장군님도 저렇게 겸허히 반성하는데, 너희들은 사소한 잘못도 숨길 생각 마라”며 협박당할 일만 남았다. 누구를 숙청할 때 ‘당 앞에 맹세하고 쓴 반성문조차 거짓으로 썼다’며 더 가혹하게 처벌해도 할 말이 없게 됐다.

 인민 앞에 매일같이 반성해도 부족한 김정은이 거꾸로 인민에게서 반성문을 받아내는 이 기괴한 장면을 보면 기가 막힐 뿐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김정은#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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