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정권은 계속 교체돼 왔지만 정치인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개헌-선거제 개편 등 정치개혁 주장
《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귀국한 12일 이후 ‘반기문’이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것을 최대한 꺼리고 있다. 반 전 총장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두 사람의 메시지는 ‘주어’만 없을 뿐 상대방을 정확히 조준하고 있다. 문 전 대표는 박근혜 대통령의 이미지를 반 전 총장에게 덧씌우려 하고, 반 전 총장은 “정치 교체”를 강조하며 문 전 대표와 각을 세우고 있다. 》
○ 반기문 직접비판 않되 날세우는 문재인
“질문 안 받겠습니다. 나중에도 말 안 할 거예요.”
12일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는 이날 귀국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에 대해 짧게라도 말해달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수행비서가 “나중에 따로 말씀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했지만 그는 “나중에도 안 한다”라며 잘라 말했다.
실제로 문 전 대표는 15일까지 반 전 총장에 관한 공개 언급을 최대한 자제했다. 반 전 총장에게 연일 십자포화를 퍼붓고 있는 다른 야권 주자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 대신 문 전 대표는 간명한 메시지로 반 전 총장을 우회적으로 겨냥했다. 귀국 일성으로 ‘정치 교체’를 꺼내든 반 전 총장을 향해 14일 “옛날에 박근혜 후보가 정치 교체를 말했다”라고 응수한 것이 대표적이다. “(반 전 총장이 말하는) 정치 교체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의 연장”이라는 프레임을 강조한 것이다.
문 전 대표의 이런 행보는 다분히 전략적으로 보인다. 문 전 대표 측 인사는 “지난 연말부터 반 전 총장이 뉴스의 중심에 있었지만 문 전 대표의 지지율은 오히려 올랐다”며 “이런 상황에서 반 전 총장과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다”고 했다. 문 전 대표는 “나는 변화와 개혁의 적임자이고, 검증이 끝난 사람이며, 가장 잘 준비된 후보”라는 ‘3대 우위론’을 연일 강조하고 있다.
반 전 총장이 노무현 정부 때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인사라는 점도 문 전 대표의 대응 방식에 영향을 줬을 것이란 시각도 있다. 실제로 문 전 대표는 15일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반 전 총장에 대한 평가를 묻자 “반 전 총장이 유엔 사무총장이 된 것은 우리나라의 자랑이고, 사무총장 10년의 활동에 대해서는 박한 평가를 내리고 싶지 않다”면서도 “저와 같은 정부에서 오랫동안 함께 일한 사이여서 (정치인으로서의) 평가를 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다”고 했다. 이어 “그분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정권교체가 아니다. 그렇게만 말하겠다”고 덧붙였다. 문 전 대표는 최근 참모들과의 회의에선 “내가 아는 반 전 총장이라면 친박(친박근혜)-비박(비박근혜)계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반 전 총장에 대한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 것이다.
나아가 정책 행보를 통해 차별화에 나서겠다는 뜻도 있다. 문 전 대표는 새해 들어 매주 토론회를 갖고 집권 후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준비된 후보’임을 강조해 아직 제대로 된 지원 조직을 구성하지 못한 반 전 총장보다 정책 역량이 앞서 있다는 점을 부각하려는 의도다.
일대일 맞상대로 키우지 않겠다는 문 전 대표의 ‘대(對)반기문’ 전략은 비문(비문재인) 진영의 기류 변화와도 연관이 있다. 비문 진영에서 논의되던 ‘빅 텐트론’, ‘제3지대론’은 정작 반 전 총장 귀국 이후에는 잠복한 양상이다. 이날 열린 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우리 당 후보로 결집하자”는 ‘자강(自强)론’이 봇물을 이룬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야권 관계자는 “반 전 총장과 국민의당 안철수 전 상임공동대표가 모두 출마하는 다자구도는 문 전 대표에게 나쁘지 않기 때문에 반 전 총장과의 전면전은 피하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 ‘문재인 패권세력’ 에둘러 꼬집은 반기문
14일 충북 음성꽃동네를 찾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은 “정권 교체로만 정치 교체를 이룰 수 있다”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비판에 “일일이 코멘트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웃음기 가신 표정으로 “정권은 계속 교체돼 왔지만 정치인들의 사고방식은 변하지 않았다”고 날을 세웠다.
반 전 총장은 12일 귀국 회견에서도 문 전 대표나 주변 세력을 직접 언급하지 않은 채 “정권을 누가 잡느냐가 그렇게 중요하냐. 패권과 기득권은 더 이상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문 전 대표 진영을 ‘남을 헐뜯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력을 쟁취하려는 패권 기득권 세력’으로 에둘러 규정한 것이다.
이는 노무현 정부에서 한배를 탔던 문 전 대표를 직접 공격하는 ‘이전투구’의 모습을 보일 경우 구태 정치 프레임에 스스로 갇히는 모순을 피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반 전 총장의 최대 정치적 자산인 유엔 사무총장 당선에 노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이 중요한 배경이 됐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반 전 총장은 친문(친문재인) 진영이 자신을 ‘정치적 배신자’로 낙인찍은 데에는 서운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반 전 총장은 야권에서 ‘23만 달러 수수설’ 등 검증 공세를 펴고 있는 것에 대해 최근 측근들과의 회의에서 “지위가 올라갈수록 새총에도 맞아 죽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조심히 살아왔다”며 결백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의 발언이나 행보로 드러난 대선 전략은 정확히 문 전 대표를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있다. 먼저 외교안보 분야에서 확실한 보수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도 사회·경제 이슈에선 서민 행보를 보이는 것은 문 전 대표에게 비판적인 중도층의 지지를 끌어내겠다는 복안으로 보인다. 전날 고향인 충북을 방문한 이후 첫 일정으로 15일 경기 평택시 해군2함대사령부의 ‘천안함기념관’을 둘러본 것도 이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서해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논란’과 노무현 정부의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기권 과정 등이 담긴 ‘송민순 회고록’ 논란 등 북한 문제로 홍역을 치른 문 전 대표의 약점을 공략하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다.
또 반 전 총장이 16일 문 전 대표의 고향인 부산을 방문해 청년들과 타운홀 미팅을 갖기로 한 것도 눈길을 끈다. 반 전 총장 캠프에선 오래전부터 귀국 뒤 빠른 시일 내에 부산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어 17일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묘지가 있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과 전남 진도군 팽목항, 18일에는 광주 국립5·18민주묘지를 참배하며 국민 대통합 행보를 이어갈 예정이다.
문 전 대표의 ‘반기문 승리=보수정권 연장’ 프레임에는 ‘개헌 연대를 통한 정치 교체’로 맞설 것으로 보인다. 반 전 총장은 15일 기자들과 만나 “헌법 개정을 포함해 선거제도와 정책결정 방식 등 전체적으로 정치제도를 개혁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대통령제뿐 아니라 선거제도 등 전반적인 개혁을 통해 최근 개헌보고서 파문으로 당내 공격을 받은 문 전 대표와 차별화하겠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문병기 기자 weappon@donga.com·평택=송찬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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