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73)의 목은 잠겨 있었다. 지난해 10월 워싱턴 행사에 온 그를 호텔 객실에서 따로 만났을 때였다.
“오늘 하루 4번이나 연설했더니 피곤하네요. 사실 내 나이면 은퇴할 때인데….”
‘정말 은퇴하시게요?’라고 짓궂게 물었지만 그는 웃기만 했다.
30여 분간의 대화에서 뜻밖의 권력 의지가 읽혔다. 대통령이 되기 위해 꼭 필요하다지만 그에게는 별로 없을 것 같았던 것. 진작부터 큰 그림을 그리며 ‘외교관 DNA’와 싸우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반 전 총장은 대선 주자 중 몇 안 되는 주연급이다. ‘유엔의 투명인간’(2009년 월스트리트저널), ‘최악의 유엔 사무총장’(2013년 뉴욕타임스)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그를 억누르겠지만 대한민국이 배출한 유엔 사무총장이라는 자산은 독보적이다.
역대 대선에서 조연급이 선택받은 경우는 별로 없다. 패자들의 인생은 드라마로 만들어도 시청률 1%가 안 나올 스토리뿐이다. 요즘 잘나간다는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의 입지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라는 주연을 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미국 대선에서 승리한 도널드 트럼프도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 덕을 봤다. 부가 존중받는 미국에서 트럼프라는 브랜드는 성공의 상징으로 통한다. 30년 가까이 정치를 하고도 남편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뛰어넘을 수 없었던 조연 힐러리에게 패배는 운명 같은 게 아니었을까.
주연급이라지만 인간 반기문에게도 약점은 많다. 그의 스토리에는 감동이 적다. 실패를 딛고 도전을 통해 만들어낸 신화가 아니라서다. 보수 평론가가 된 전여옥 씨의 “매력 없다”는 평가도 그런 맥락이다.
주변에 참신한 인물도 없다. 친이(친이명박)·친박(친박근혜) 출신 앞세우며 정치 교체를 말하면 기존 정치인과 다를 게 없다. 김종인 안철수 손학규를 만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래 봐야 국민이 염증 내는 정치공학 이야기다. 입이 떡 벌어질 한두 사람은 옆에 세워야 국민이 의지와 비전을 읽는다.
트럼프가 국무장관으로 지명한 렉스 틸러슨은 엑손모빌 최고경영자였지만 지난주 청문회에서 외교에 탁월한 식견을 보여 미국을 놀라게 했다. 석유 사업을 하며 세계의 흐름을 체득한 경영자의 성공 모델을 외교행정에도 접목하겠다는 구상. 정치 아웃사이더 트럼프는 의외의 인물을 깜짝 발탁하며 미국을 어떻게 바꿀지 분명한 메시지를 던졌다.
정치인 반기문은 ‘박근혜 심판론’과도 슬기롭게 싸워야 한다. 대선 후보가 된다면 좋든 싫든 보수진영을 업어야 한다. 거짓 보수를 심판해야 한다는 큰 흐름을 인물론과 지역구도로 막기는 쉽지 않다. 반기문이 승리하려면 보수 먼저 공격해야 한다. 비정치인 프리미엄은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트럼프 역시 경선에서 공화당부터 짓밟았다. 오락가락했던 당 1인자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비겁한 겁쟁이’로 몰아붙인 것도 모자라 경선 경쟁자였던 테드 크루즈의 부인을 매춘부 취급했다. 시쳇말로 ‘이놈 저놈 다 제치고’ 대권을 거머쥔 게 트럼프였다. 그 결기로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 줬다.
40년 직업외교관 출신인 반 전 총장이 썩어 문드러진 한국 정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다. 도전 자체가 삶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약속한 정치혁명을 완성하진 못했다. 그래서 반 전 총장의 말을 귀담아듣게라도 하려면 트럼프처럼 정적에게 쌍욕이라도 할 독기가 필요하다. ‘기름장어 반기문’이 허물어져 가는 보수의 마지막 희망이 되려면 악어까지 죽인다는 ‘전기장어’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야 정치도 바꾸고 용도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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