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보수의 소모품 되라니… 내가 너무 순수했다” 회의감 토로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일 03시 00분


[반기문 불출마 선언]귀국 20일만에 중도하차, 왜

 “사실은 (내가) 꽤 인기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한국에) 와 보니 (상황이) 달라서 당황스럽다.”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달 25일 국회의원들과의 비공개 조찬 간담회에서 한숨을 내쉬며 한 말이다. 귀국 직후 정치교체와 국민통합 행보로 ‘반기문 바람’을 일으킬 수 있다는 기대가 꺾였음을 내비친 것이었다. 이후 정치권 주요 인사들과의 만남은 기존 정치권의 높은 벽을 실감하는 계기가 됐다. 귀국한 지 20일 만인 1일 대선 불출마를 전격 선언하기까지 반 전 총장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반 전 총장은 대선 출마 의사를 명확히 밝히지 않았음에도 지난해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기록하며 ‘반기문 대망론’이 거론될 정도였다. 퇴임을 앞둔 지난해 12월 20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한국특파원단을 만나 “대한민국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한 몸 불살라서 노력하겠다”고 사실상의 대선 출마를 하며 단숨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에 대항할 주자가 됐다.

 지난달 12일 ‘금의환향’한 반 전 총장은 곧바로 충청과 영호남을 넘나드는 민생 투어에 들어갔다. 국민에게 직접 경청과 소통의 리더십을 보여줘 단번에 대선 주도권을 잡으려는 반 전 총장의 승부수였다.

 하지만 반 전 총장의 발목을 잡은 건 ‘가짜 뉴스’였다. 반 전 총장 측이 꼽는 대표적 가짜 뉴스는 ‘퇴주잔 논란’이다. 지난달 14일 충북 음성 부친 묘소 성묘 중 퇴주잔을 받아 마시는 것처럼 짜깁기한 동영상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또 지난달 18일 조선대 강연에선 “광주는 훌륭하신 충렬공이 탄생한 곳”이라는 반 전 총장의 발언을 일부 언론이 ‘충무공’으로 잘못 알아듣고 오보를 내는 해프닝도 빚어졌다. 크고 작은 실수와 가짜 뉴스가 겹쳤고 반 전 총장의 민생 행보는 오히려 ‘반기문 기대감’을 떨어뜨리며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졌다.

 여기에 ‘정치 신인’ 반 전 총장에 대한 기존 정치권의 냉대는 반 전 총장의 입지를 급속도로 좁혔다. 반 전 총장의 초기 구상은 개헌 세력을 결집해 반문(반문재인) 진영에 ‘빅텐트’를 친 뒤 통합 경선을 통해 자신이 문 전 대표와 일대일 구도로 맞붙는 그림이었다. 이를 위해 10여 일간 여러 정치인을 의욕적으로 만났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반 전 총장에게 돌아온 것은 냉소적 반응이었다.


 반 전 총장은 1일 캠프 관계자들과 저녁 식사를 한 뒤 자신의 자택 앞에서 기자들을 만나 “정치교체를 통해 이 나라를 바꿔보려고 했다”며 “(정치인들이) 허심탄회한 얘기를 안 하고 계산을 하더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이어 “(가짜 뉴스로) 완전히 인격 말살을 하고 계속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은 용납이 안 된다”며 “내 양심에 비춰 봐도 ‘뭐가 문제가 되냐’ 이런 것이 있다”고 토로했다.

 일각에선 반 전 총장 스스로 기회를 위기로 만들었다는 지적도 나온다. 자신의 정체성을 ‘진보적 보수주의’로 규정한 게 대표적 예다. 반 전 총장은 불출마 선언 전 새누리당 인명진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난 자리에서 “양 진영으로 갈라놓고 (당신은) 보수냐, 진보냐라고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마지막까지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스스로 지지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보수층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에게로 옮겨 가는 빌미를 제공했다.

 반 전 총장의 중도하차는 ‘정치적 아마추어리즘’에서도 비롯됐다. 반 전 총장은 지난달 16일 경남 김해에서 기자들을 만나 “홀로 하려니 금전적인 것부터 빡빡하다”며 입당 가능성을 내비쳤다. 입당이라는 자신의 최대 무기 중 하나를 무의미하게 날려버린 셈이다. 정치교체와 개헌추진협의체 제안 등 자신의 정치적 어젠다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메시지 전달력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송찬욱 기자 song@donga.com
#반기문#선거#불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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