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이 지난달 12일 귀국 일성으로 ‘진보적 보수주의자’를 내세웠을 때 그의 파국은 어느 정도 예정된 일이었을지 모른다. 지지층을 최대한 넓히겠다는 원래 의도는 빗나갔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탕수육) 부먹(소스 부어 먹기)적 찍먹(찍어 먹기)주의자’ ‘둥근 사각형’ 같은 패러디를 양산하면서 그의 이미지를 희화화했다.
이처럼 상반된 어휘를 결합하는 수사법을 ‘형용모순(Oxymoron)’이라 한다.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이 말은 날카롭고 예리하다는 옥시(oxy)와 바보나 저능아라는 모론(moron)의 합성어다. 즉 ‘똑똑한 바보’라는 말 자체에 모순이 담겨 있다.
형용모순은 극적 긴장감을 조성하고 감정의 미묘한 떨림을 일깨우는 데 효과적이다. 예술가들이 즐겨 쓰는 이유다. 청마 유치환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만해 한용운이 ‘아아,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라고 했을 때 누구도 논리 오류를 문제 삼지 않는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단어들이 빚어내는 특별한 뉘앙스에 오히려 감동을 받는다. 사이먼 앤드 가펑클의 ‘침묵의 소리(The Sound of Silence)’가 팝 역사에 남을 명곡이 된 것도 비슷한 이치다.
세상을 주름잡는 예술가들만 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형용모순과 양가성(ambivalence)을 내포한 단어 프레너미(friend+enemy·친구와 적을 합한 단어), 코피티션(cooperation+competition·협력과 경쟁을 합한 단어), 디지로그(digital+analog·디지털과 아날로그를 합한 단어), 심플렉시티(simple+complexity·간단함과 복잡합을 합한 단어), 글로컬라이제이션(global+localization·세계화와 현지화를 합한 단어) 등은 이미 우리 일상에 깊숙이 들어와 있다. 혼밥과 혼술을 즐기면서 이를 꼭 사진으로 남겨 굳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남과 공유하려는 행위도 비슷한 맥락이다. ‘나 혼자’와 ‘함께’를 다 누리려는 심리다.
과거에 공존할 수 없을 것 같던 상반된 가치와 개념이 대등한 힘을 갖고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시대다. 날로 복잡다단해지는 세상에서 형용모순이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특히 단선적 사고로 해결할 수 없는 갖가지 문제가 산적한 현대 사회는 오히려 ‘사회적 기업’과 같은 창의적 형용모순을 절실히 요구한다.
기업의 존재 이유를 이윤 극대화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기업은 일종의 말장난일 수 있다. 하지만 신발 한 켤레를 판매할 때마다 빈곤국 어린이에게 신발을 기부하는 탐스슈즈, 환경보호와 공정무역에 앞장서는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 지역 주민의 창업을 후원하는 자포스 등 사회적 가치를 우선하면서도 피 튀기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기업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형용모순이 일반화된 시대일수록 메시지의 내용이 아니라 진정성이 중요하다. ‘증세 없는 복지’는 대통령 박근혜를 만든 일등공신이었지만 지금은 그의 무능을 상징하는 동의어로 쓰인다. 반 전 사무총장이 진보적 보수주의자를 자처하기 전에 본인의 삶과 이력을 통해 이 말의 진정성부터 보여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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