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장관을 지낸 후 유엔 사무총장. 그리고 대통령 당선. 제8대 유엔 사무총장 반기문에 앞서 제4대 유엔 사무총장을 지낸 쿠르트 발트하임의 약력이다.
발트하임 하면, 유엔 사무총장 중에서도 비교적 한국인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그가 재임한 1972년부터 1981년까지는 유엔의 목소리가 한국에 유독 크게 들린 시기였다. 남북 정치회담과 분단국의 유엔 가입 같은 이슈가 취임 초부터 흘러나왔고, 한국 통일의 여건과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10년 내내 언급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월유신 선포로부터 전두환 대통령 취임까지의 기간이었다.
발트하임은 유엔총장직에서 물러난 5년 뒤 고국 오스트리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나치에 협력한 전력이 줄곧 여론의 질타를 받으며 발목을 잡는 듯했으나 그는 여론의 과반수를 업고 당선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오스트리아에 보수파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외신 보도가 한국 신문에 인용되었다. 아울러 사회당 중심의 오랜 좌파 집권이 꺾이는 유럽의 시대적 추이가 조심스레 진단되었다. 그 1986년은 되돌아보면 독일의 분단 장벽 와해를 위시하여 동유럽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기 3년 전이었다.
발트하임 대통령 당선을 알리는 커다란 제목의 신문기사 아래 보일 듯 말 듯한 제목으로 한국의 정치 상황을 전하는 외신이 실렸다. 제목은 ‘한국 개헌 타결 가능성’.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여야당 간 개헌 협상은 높아가는 정치적 긴장을 완화하고 정부 선택에 관한 한국민의 발언권을 강화할 가능성이 엿보인다고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정부와 야당이 정치적 휴전에 들어간 데 이어 개헌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임시국회가 개회되었다. 개헌 협상이 타결에 가까워질수록 야당의 두 지도자인 김대중 김영삼 씨 간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고 신문은 논평했다.’(동아일보 1986년 6월 9일자)
지금으로서는 마치 30년 만에 돌아온 개헌이라는 이름의 회전목마처럼 보인다. 지금의 현역 정치인들은 별 존재감도 없던 그 1986년의 여름, 한국은 서울 아시아경기대회 개막을 앞두고 정치 민주화와 노동운동 활성화에 힘입어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제1야당이 둘로 쪼개지던 때였다.
발트하임에 이어 다음 유엔 사무총장도 10년 재임 후 귀국한 지 4년 만에 고국 페루의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그는 강력한 후보 알베르토 후지모리에게 밀려 낙선했다.
그리고 20여 년 만에 반 전 총장이 그 간헐적인 전통을 계승하려 하자 유엔은 완곡한 표현으로 강한 반대의사를 표시했다. 자국 정부의 외교장관을 마치고 바로 유엔 사무총장이 된 두 전임자의 선례를 따라가는 모양새는 같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앞의 두 사람이 퇴임 후 4, 5년간의 휴지기를 두고 출마했다는 점이었다.
반 전 총장의 정치 입문을 무산시킨 것은 역설적으로 그의 조국이었다. 유엔 사람들은 의아히 여겼을지 모른다. 왜 그리 급하게 출마하느냐, 몇 년도 못 참고. 한국인이 아니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현직 대통령의 법정 임기를 하루라도 더 단축하여 빨리 선거하자는 나라에 살지 않는 사람으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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