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동정민]정치가 넘지 말아야 할 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6일 03시 00분


코멘트
동정민 파리 특파원
동정민 파리 특파원
 “이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법적 문제다.”

 지난달 24일 영국 런던 대법원 앞. 한 여성이 수십 대의 카메라 앞에 섰다. 이 여성은 “지난 7개월 동안 나를 향한 입에 담을 수 없는 협박과 비판에 사설 경비를 쓰고 다녔다. 그러나 이것은 이기고 지고의 문제가 아니라 옮음의 문제다. 오늘 판결로 민주주의 절차의 기반과 법적 토대가 마련됐다”고 감회를 토로했다.

 평범한 민간 펀드회사 대표인 지나 밀러는 지난해 6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 국민투표 가결 이후 “의회의 승인 절차 없이는 브렉시트를 추진할 수 없다”며 영국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고, 대법원은 밀러의 손을 들어줬다.

 영국 대법원장은 판결을 내리면서 “브렉시트 국민투표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의미를 갖지만 법적 권한은 분명히 의회에 있다”고 밝혔다. 국민 여론과 무관하게 삼권 분립에 따른 법적 절차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건 이날 법원 판결 이후 영국의 반응이었다. 데이비드 데이비스 브렉시트 장관은 물론이고 극우 성향의 영국독립당마저 대법원 판결에 존중의 뜻을 나타냈다. EU 탈퇴론자인 한 전직 장관이 BBC 프로그램에 출연해 “선출되지도 않은 대법관들이 선출직인 하원에게 간섭하는 게 당황스럽다. 딴 세상에 사는 사람”이라고 비판했다가 브렉시트 지지자들로부터조차 “부적절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원하는 바와 반대로 판결이 나와도 법원의 독립성은 존중하는 게 국가 시스템을 지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영국 하원은 1일 표결을 통해 총리가 브렉시트 발동 권한을 가지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결과적으로 대법원 판결로 테리사 메이 정부는 성가신 절차를 거쳤지만 절차적 정당성을 얻었고, 의회는 백서를 받아내 행정부를 감시할 수 있는 추가 기회를 얻었다. 윈윈인 셈이다.

 미국 시애틀 연방법원은 3일 무슬림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과 비자 발급을 일시 중지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행정명령의 효력 중단을 결정했다. 이제 그 판결은 연방대법원의 손에 맡겨졌다. 대통령의 결정도 법원이 뒤집는 게 미국 국가 시스템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에서 “‘소위(so-called)’ 판사의 의견은 터무니없다”고 비난했지만 백악관은 공식 성명에서 ‘터무니없는(outrageous)’이라는 표현을 넣었다가 뺐다.

 선진국이 국민소득으로만 결정되는 건 아니다. 확고한 국가 시스템을 통한 사회 안정은 선진국의 필수조건이다. 유불리에 따라 국가 시스템이 바뀐다면 언제든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이번 ‘최순실 스캔들’로 국민이 받은 첫 충격은 믿었던 국가 시스템의 고장이었다. 정호성 청와대 부속비서관 스스로 “청와대에서 대외적으로 없던 사람”이라고 밝힌 최순실이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고 인사에 개입한 건 정도와 상관없이 시스템에 구멍이 생긴 것이었다. 그 책임을 물어 국회는 헌법 65조에 의해 탄핵 소추를 결정했다. 그리고 헌법 111조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결정한다.

 그런데 벌써부터 헌재 결정에 불복 움직임이 양측에서 보인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박근혜 대통령 측은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 “3월 13일 전에 결론이 나는 게 바람직하다”고 하자 “탄핵 결정을 내리기에 짧아 공정성에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며 헌재 압박에 나섰다. 지난달 판사가 재벌 총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하자 법원의 판결을 강력히 비판했던 야당의 한 지도자는 “탄핵을 기각하면 혁명”이라며 헌재를 압박하고 있다. 정권은 유한하지만 국가는 영원하다. 헌재의 결정은 따라야 한다. 촛불도 태극기도 이를 바꿀 권한은 없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
#브렉시트 국민투표#최순실 스캔들#헌법재판소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