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이제 와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얘기를 꺼내긴 싫었다. 정치에 발끝을 살짝 대 보더니 너무 차갑다며 떠난 그다. 하지만 그의 실패를 복기하는 건 의미가 있다. 한국 정치가 왜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하는 “불모(不毛)의 흥분 상태”(박상훈의 책 ‘정치의 발견’ 중 인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설명해주기 때문이다.
반 전 총장을 도운 이상일 전 의원은 반 전 총장이 불출마를 선언하자 소설 ‘주홍글씨’를 인용해 이런 글을 남겼다. “세상에서 가장 용서받지 못할 죄는 다른 사람의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는 일이다. 진영논리에 빠진 유력 정치인들이 한 행동은 반 전 총장의 순수한 마음의 성역을 침범하고 손상했다.”
반 전 총장은 불출마 선언 전 10여 일간 부지런히 정치인들을 만났다. 하지만 그들을 만나고 돌아와선 늘 답답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1시간 넘게 만나도 아무런 확답을 들을 수 없어서다. 이 전 의원은 이걸 순수함이라고 했다. 정치권에선 순진함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질은 ‘정치에 대한 무지’다.
반 전 총장은 정치 신인들의 실패 공식을 답습했다. 바로 ‘반(反)정치의 정치’다. 정치혐오 여론에 기대 정치권력을 잡겠다는 구상이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투샷을 추가해 연하게 달라’는 주문과 같다. 반 전 총장이 내세운 ‘정치교체’의 근거는 역대 모든 정부의 실패다. ‘그러니 정권교체 해봤자 달라질 게 없다. 정치권을 갈아엎자’는 논리다. 그런데 참 희한하다. 정치를 갈아엎자면서 그는 정치권 변방을 기웃거렸다. 더욱이 그는 실패한 역대 정부에서 늘 중책을 맡았으니 참 아이러니하다.
반정치의 정치는 분명 매력적이다. 모든 여론조사의 지지율 1위는 ‘지지 후보 없음’이다. 정치인 신뢰도는 ‘처음 만난 사람’보다 낮다. ‘뭉텅이 표(집토끼)’가 없는 정치 신인에게 반정치는 블루오션이다. 하지만 그게 반정치의 함정이다. 정치혐오로는 유권자를 투표장에 끌어낼 수 없다.
여기서 필자의 ‘놀라운(?) 발견’을 소개하겠다. 우리나라 유권자는 신상품을 좋아한다. 반정치의 정치도 한국적 ‘신상품 선호증후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문민정부를 탄생시킨 1992년부터 모든 대선에서 정치 입문 시기가 빠른 후보가 당선됐다. ‘반정치의 역설’이다.
1992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로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경쟁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보다 7년 빨랐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회창 후보(정치 입문 1996년)를, 노무현 전 대통령(1988년)은 이 후보를, 이명박 전 대통령(1992년)은 정동영 후보(1996년)를, 박근혜 대통령(1998년)은 문재인 후보(2012년)를 이겼다.
물론 대선 승자가 정치 경험이 많아서 이긴 건 아니다. 하지만 반정치에 기대서만은 승리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건 정치 경험이 더 많은 대선 승자가 집권 이후 예외 없이 국회를 무시하고 장악하려는 반정치의 유혹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역대 대통령의 실패는 자신들의 모태인 정치를 부정한 데서 출발한다.
안철수 전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가 반전의 모멘텀을 잡지 못하는 것도 그의 ‘새 정치’가 반정치에서 출발했고, 아직도 거기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강고한 ‘안티 세력’이 존재하는 이유도 그의 분파적 사고 때문이다. 문 전 대표의 ‘국가 대청소’는 타협과 양보라는 정치의 본령과는 거리가 있다.
이영작 서경대 석좌교수는 문 전 대표를 두고 “과거에 얽매인 피해자 중심의 정치로는 결코 큰 정치를 할 수 없다”고 했다. 안 전 대표에게는 “허황된 얘기가 아니라 작은 성취라도 보여줘야 한다”고 충고했다.
반면 이번 대선의 다크호스로 떠오른 안희정 충남도지사의 언어는 다르다. “5년마다 바뀌는 대통령이 모든 것을 뒤집는 식의 정책을 내세우는 건 옳지 않다. 이전 정부를 부정하는 정권교체가 아닌 역대 정부의 긍정성을 계승하는 정권교체를 이루겠다. 나는 민주적 리더십을 훈련받은 정당정치인이다.”
정치 신인이었던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펴낸 ‘담대한 희망’에서 “왜 정치판처럼 더럽고 추잡한 곳에 뛰어들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정책 우선순위를 약간만 조정해도 모든 어린이가 자신의 인생을 개척해 나가도록 도와줄 수 있다.”
이것이 정치의 위대함이다. 반 전 총장의 순수함을 손상한 정치인의 탐욕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인간 본성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인간의 탐욕을 조정하고 그 안에서 길을 찾는 게 정치 지도자다. 반정치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기에 정치를 혐오의 대상이 아닌 관심의 대상으로 돌려세우는 데서 지도자는 탄생한다. 그것이 분노와 절망으로 얼룩진 2017년 대한민국 광장에 보낼 정치권의 응답이다. ‘분노하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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