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환출자 끊는 묘책이라더니… 이제와서 지주회사 가로막나”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1일 03시 00분


[위기의 재계]야권 ‘정책 역주행’에 재계 당혹


#1.
2003년 3월 1일 LG그룹은 화학부문 지주회사인 LGCI와 전자부문 지주회사인 LGEI를 합병해 통합 지주회사 ㈜LG를 공식 출범시켰다. 당시 정치권에서는 “LG그룹이 다른 그룹에 한발 앞서 오너 중심의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함으로써 재벌개혁을 핵심 과제로 삼고 있는 새 정부의 정책기조에 가장 먼저 부응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2. 삼성전자는 2017년 3월 말로 예정된 정기 주주총회 안건에 ‘인적분할을 통한 지주회사 전환’ 등 지배구조 개편안을 포함시키지 못했다. 삼성전자의 지주회사 전환 검토는 지난해 11월 처음 공식화되면서 시장의 기대감을 끌어냈던 이슈다. 그러나 삼성그룹은 지난해 말부터 이어져 온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와 최근 야권에서 주도하는 지주회사 규제 강화에 상당한 부담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대체 어쩌란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지주회사 전환을 적극 유도했고, 그 취지에 공감해 차근차근 쌓은 결과물이 이제는 개혁 대상이 된다니 당황스러울 따름입니다.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국내 A그룹 임원)

정치권의 ‘정책 역주행’ 속에 지주회사 전환을 둘러싼 재계의 고민이 커지고 있다. 지주회사란 자회사들의 주식을 전부 또는 일부를 사들여 지배권을 행사하는 회사다. 국내에선 외환위기 이후인 1999년 4월 공정거래법 개정과 함께 처음 도입됐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장려 속에 LG그룹과 SK그룹이 각각 2003년, 2007년 지주회사 전환을 마쳤다. 최근에는 삼성 외에 롯데그룹도 지주회사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정부들과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야당이 잇달아 지주회사 전환을 막는 규제를 내놓자 기업들은 황당해하고 있다.

○ 지주회사 규제가 지배구조 개선?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지주회사의 자회사 의무소유비율을 높이고 부채비율 한도를 축소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현행 공정거래법은 지주회사가 상장 자회사 지분을 20%(비상장사는 30%) 이상 보유하고 부채비율은 200%를 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의무소유비율을 어느 정도까지 올리겠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현행 20%에서 30%로 10%포인트만 늘려도 천문학적 비용이 추가로 들어간다”고 했다. 삼성전자의 경우 원론적으로 볼 때 20일 종가 기준으로 지분 30%를 확보하려면 81조 원이 든다. 현행 20%를 확보할 때 필요한 54조 원보다 30조 원가량 더 필요하다. 현대자동차도 9조 원가량이 더 든다.

야권이 이달 임시국회에서 우선 처리하겠다는 공정거래법과 상법개정안에도 지주회사 전환을 막는 방안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지주회사 전환 시 자사주 활용을 제한하는 법안이 대표적이다.

지주회사들이 자회사 의무소유비율을 맞추려면 큰 자금이 든다. 각 기업들은 자회사를 분할할 때 자사주 몫만큼의 분할 자회사 신주를 배정받는 방식으로 요건을 충족해왔다. 개정안들은 배정받은 신주에 대해 법인세를 물리거나 아예 지주회사 전환 전에 갖고 있던 자사주를 모두 소각하도록 하고 있다. 그룹 지배구조 강화에 자사주를 남용하는 것을 막겠다는 의도다.

○ 지주회사 전환하라고 할 땐 언제고

역설적으로 지주회사 제도는 김대중 정부가 도입하고 노무현 정부 때 안착된 제도다.

김대중 정부는 외환위기 이후 기업 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인지하고 지주회사 설립을 허용했다. LG그룹이 2002년 11월 국내 그룹 중 가장 먼저 지주회사 전환을 결정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재계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외환위기 후 순환출자와 상호출자 등을 기반으로 한 회사의 재무구조 악화가 다른 계열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경각심이 높아졌다”고 기억했다. 지주회사 전환에 대한 공감대를 갖게 됐다는 설명이다.

노무현 정부 들어서는 ‘지주회사=선진국형 지배구조’라는 인식이 자리 잡혔다. 2006년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이 지주회사가 의무적으로 가져야 할 자회사 지분을 30%에서 20%로 완화해 줬을 정도다.

GS, SK, CJ 등 대형 그룹들이 잇따라 지주사로 전환했다. 정부와 정치권, 시민단체들은 지주회사 전환을 머뭇거리는 삼성과 현대차 등에 전환을 촉구하기도 했다. 2003년 강철규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은 “대기업 정책으로 선진국형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을 적극 유도하겠다”고 말했다.

재계에서는 “정부와 정치권이 지주회사는 재벌 지배구조를 대체할 ‘모범답안’이라는 공감대를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손바닥 뒤집듯 정책을 바꾸는 건 너무 무책임하다”는 반발이 나온다.

규제 실효성에 관한 지적도 있다. 문 전 대표는 지주회사 부채비율이 20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겠다고 밝혔다. 현재 지주회사로 전환한 기업집단의 평균 부채비율은 25.7%에 불과하다. 현실과 동떨어진 규제라는 것이다. 지주회사 전환에 과도한 비용이 들 경우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소액 주주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목소리도 있다.

김지현 jhk85@donga.com·서동일 기자
#정책 역주행#지주회사#순환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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