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이전 일이다. ‘향수’의 시인 정지용이 고기 한 근을 사들고 서울 혜화동 사는 김동리를 찾았다. 고기 안주를 기다리다 나오지 않아 정지용이 화장실을 가면서 들여다보니 김동리 아내가 부엌에서 고기를 보고만 있었다. “왜 그러느냐”고 묻자 돌아온 대답. “고기반찬을 먹은 지 하도 오래돼 어떻게 요리하는지 모르겠어요.” 정지용은 김동리에게 “이렇게 가난한 줄 몰랐다. 그런데 아직 사회주의자가 되지 않았느냐”라고 말했다.
▷김동리는 처음에는 시로 출발했으나 이내 소설로 돌아섰다. 선(禪)이나 무속 같은 동양적 세계를 파고든 ‘무녀도’ ‘을화’ ‘등신불’ 같은 명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절필해 친일을 거부했고 해방정국에서는 사회주의계열 ‘문학가동맹’에 맞서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이끌었다. 동양철학자였던 맏형 김범부가 “난세에는 확실히 어느 한쪽에 서라”고 권하자 우익을 택했다는 일화가 있다.
▷22일 헌법재판소에서 강일원 재판관을 향해 “그렇게 하면 국회 측 수석 대리인이 되는 거다” 같은 막말을 쏟아낸 김평우 변호사는 김동리의 차남이다.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에 뒤늦게 합류해 공세를 주도하고 있다. 그는 ‘탄핵을 탄핵한다’ 책을 펴내 언론이 최순실 사태를 사실로 몰아가면서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는 ‘12·9 정변’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부친 김동리를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그는 “이제 칠십이 넘어 무서운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는 김동리의 ‘문학적 아들’이다. 부친의 좌익 활동으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 살아남기 위해 ‘김동리의 우산’ 밑으로 들어가겠다고 결심했다. 김동리는 이문구를 거둬들여 30년간 신원보증인 역할을 주저하지 않았다. 김동리를 의식한 사정당국은 이문구가 미워도 건드리지 못했고 이문구는 좌우로 나뉜 문단의 화합을 위해 몸을 던졌다. 2003년 이문구의 장례를 민족문학작가회의(현 한국작가회의) 국제펜클럽 한국문인협회 3개 단체가 함께 치른 것은 문단사 초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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