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국 5847개 중고교 중 유일하게 국정 역사 교과서 연구학교인 경북 경산시 문명고에는 외부인이 학교로 들어와 연구학교 지정 철회를 요구했다. 학교 측은 이를 ‘협박’이라고 표현했다. 국정 교과서를 참고자료로라도 쓰기 위해 신청한 학교는 외부의 공격 대상이 될 것을 우려해 학교 이름조차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시도교육청은 신청 현황 파악에 나섰고, 광주에선 국정 교과서를 신청했던 한 사립고가 “문제가 이렇게 커질 줄 몰랐다”며 신청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
전문가들은 학교가 자율적으로 신청한 연구학교를 외부인이 철회하라고 압박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어긋나고 학문 연구와 교육의 다양성 및 자율성을 부정하는 행태라고 지적했다.
① 다양성 외치다 지금은 다양성 말살
당초 국정 역사 교과서에 대한 반발은 다양한 교과서를 국가가 만든 하나의 교과서로 대체하려 한다는 논리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정부가 올해 모든 학교에서 국정 교과서를 사용하게 하려던 계획을 포기하면서 국정 교과서는 여러 교과서 중 하나가 됐다. 그럼에도 국정 교과서 반대파는 국정 교과서 자체를 없애려는 분위기다.
이에 전문가들은 국정 교과서의 문제는 획일성인데, 현재의 국정 교과서 반대 주장은 오히려 획일성을 강요하고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교과서 국정화는 획일성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인데, 국정 교과서가 됐건 보수적 시각의 교과서가 됐건 이를 거부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또 다른 반역사적 논리”라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어떤 학교도 국정 교과서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전체주의적 사고라고 비판했다.
송기창 숙명여대 교수는 현 국정 교과서 반대 주장에 논리적 모순이 있다고 지적했다. 다양성을 이유로 국정 교과서를 반대하던 이들이 현재는 다양성을 저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교과서 검인정 체제의 장점이 다양성인데, 여러 교과서 중 하나가 돼 버린 국정 교과서의 선택을 막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 있다”고 말했다.
② 침해되는 학교와 학습 자율권
3년 전 부산 부성고는 교학사의 한국사 교과서를 채택했다가 몸살을 겪었다. 당시 금성 교과서 등 좌편향 논란이 있던 교과서에 맞서 뉴라이트 학자들이 교학사 교과서를 만들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진보단체들이 학교에서 연일 시위를 하며 철회를 요구했다.
최근 문명고에서 이 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다. 문명고가 연구학교로 지정된 이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교조 관계자들이 교장실까지 난입해 막말을 퍼붓고 위협적인 행동을 벌인 것. 전문가들은 학교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김희규 신라대 교수는 “학교가 법정 기구인 학교운영위원회를 거쳐 내린 결정을 특정 단체나 개인이 자신의 성향에 따라 무시하고 좌지우지하려는 것은 비교육적이고 타당하지도 않다”고 비판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문명고 비판이 선을 넘었다고 지적했다. 윤 교수는 “해당 학교에서 시위는 할 수 있다고 보지만 교장실 난입과 거친 항의가 난무하는 상황은 민주사회, 다원화된 사회에서 선을 넘은 행위”라고 우려했다.
교육 관련 단체들도 우려하고 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반대 세력이 찬반에 매몰돼 학교의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다”며 “교과서 찬반을 넘어 학교 자율성을 침해하는 행동을 삼가 달라”고 요청했다. 대한사립중고등학교장회는 “단위 학교의 교육과 운영에 관한 사안에 외부 세력이 개입해 유무형의 폭력을 자행하는 일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③ 시장 논리로 선택·도태돼야
전문가들은 이미 제작돼 세상에 나온 국정 교과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 교과서의 운명은 학생, 교사 등의 선택에 맡기는 것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내용조차 보지 않은 채 반대하거나 위협을 통해 선택을 막는 것은 올바른 해결 방안이 아니라는 것.
윤 교수는 “국정 교과서에 문제가 있다면 교과서 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발본색원하겠다는 식의 무리한 행동은 맞지 않다”며 “교과서 내용을 판단한 다음 채택되거나 퇴출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병준 교수도 “연구학교가 한 곳이고, 수십 개 학교에서 참고자료 등으로 활용한다고 하니 국정 교과서가 잘못됐다면 학생 학부모 교사가 문제를 제기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육 현장에서 국정 교과서를 둘러싸고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동안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무책임하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정부의 정책을 따른 학교가 공격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도 뚜렷한 보호 방안도 없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교육부 관계자는 “학교의 요청이 있으면 필요한 부분에 대해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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