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사이]북한군 설계연구소장이 처형된 사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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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변에 새로 건설된 미림승마구락부. 김정은은 A자 형태의 지붕이 건너편 금수산태양궁전에 드리는 자신의 경례를 형상화했다고 설명했다.
대동강변에 새로 건설된 미림승마구락부. 김정은은 A자 형태의 지붕이 건너편 금수산태양궁전에 드리는 자신의 경례를 형상화했다고 설명했다.
주성하 기자
주성하 기자
김정은은 농구광으로 알려졌지만 11세 때엔 승마에 푹 빠졌던 적이 있다. 평양 미림승마구락부에 가면 김정은이 1990년부터 2013년까지 총 386차례나 승마를 했고, 특히 1995년 한 해 동안 149차례나 찾아와 집중적인 승마훈련을 했다고 해설사가 설명한다. 금수산태양궁전 건너편에 위치한 미림승마구락부 자리엔 원래 중대급인 북한군 ‘534 기마부대’가 있었다. 말이 기마부대이지 사실 김씨 일가 전용 승마장이다. 김정일도 이곳을 자주 찾았다.

북한에서는 황태자였지만 1990년대 말 스위스에 간 김정은이 현지에서 말과 전용 승마장을 구할 여력은 없었던 것 같다. 김정은은 말 대신 농구에 빠졌다. 당시 동창들에 따르면 김정은은 여학생들에게 말도 못 걸 정도로 수줍음을 많이 탔다. 그러나 농구공만 잡으면 승부욕에 불타 ‘폭발적 플레이메이커’란 평가를 들었다. 미국프로농구(NBA)에 푹 빠져 있던 김정은의 방에는 어떻게 찍었는지는 몰라도 그가 LA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 시카고 불스의 토니 쿠코치 등 당대의 유명 농구 선수들과 찍은 사진도 있었다고 했다.

나중에 북한 ‘최고 존엄’이 된 김정은은 2012년 평양에 물놀이장과 롤러스케이트장을 만들고 마식령에 스키장을 짓는 등 놀이시설 건설에 집착했다. 김정일의 요리사를 지낸 후지모토 겐지 씨는 2008년 8월 김정은이 “우리는 여름이면 제트스키도 타고 승마도 하는데 일반 사람들은 뭘 하면서 놀까” 하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아마 김정은에겐 놀이시설 건설이 인민을 위한 나름의 배려였던 것 같다.

승마의 즐거움도 전하고 싶었던지 김정은은 2012년 11월 미림승마장을 찾았다가 “이곳에 인민을 위한 승마장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지으라고 그림까지 그려가며 자세한 지시를 마원춘 국방위원회 설계국장에게 내렸다. 마원춘은 다시 구체적 설계 지시를 북한군 설계연구소에 맡겼다. 설계소장이 기초 도안을 살펴보니 건물 정면 뾰족한 지붕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미림승마장은 대동강 바로 옆에 있는데, 겨울엔 강을 따라 강풍이 불어내려 온다.

설계소장이 마원춘에게 말했다.

“강풍이 센 이곳에 이 설계대로 지으면 자칫 지붕이 날아갑니다. 지붕 방향을 강과 반대로 돌려 앉히면 될 것 같은데 이런 의견을 좀 보고해 주십시오.”

마원춘이 듣고 보니 합리적 의견인지라 “알았어. 내가 보고하지”라고 답변했다. 설계소장은 자기의 뜻이 받아들여진 것으로 믿고 지붕을 반대로 돌려 앉힌 대로 건설을 시작했다.

건설이 한창이던 2013년 5월 김정은이 승마장 건설장을 찾아 둘러보다 갑자기 얼굴이 사색이 됐다.

“뭐야, 지붕이 왜 저 방향이야.”

갑자기 당황한 마원춘은 자기가 직접 설명하는 대신 설계소장을 불렀다.

“여긴 강바람이 너무 셉니다. 바람에 지붕이 날아갈까 봐 뒤로 돌려 앉혀서….”

설계소장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김정은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이놈들이 누구 맘대로 설계를 뜯어고쳐. 이런 놈 필요 없어.”

그러고는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차를 타고 떠났다. 설계소장은 현장에서 호위사령부에 체포된 뒤 다음 날 처형됐다. 죄명은 ‘1호 행사 방해죄’였다. 마원춘의 비겁함에 애먼 설계소장이 처형되고 가족도 풍비박산 난 것이다. 당시 김정은이 승마구락부 건설장에서 화를 냈다는 것을 북한 매체가 이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마원춘 역시 이듬해 숙청됐다가 다행히 복권되긴 했지만 이후 승마장 사건과는 무관한 일로 처벌을 받았다.

김정은은 그해 10월 미림승마구락부가 완공될 때까지 무려 10여 차례 현장을 방문했다고 한다. 자기 뜻대로 건설되고 있지는 않은지 불안했던 것 같다.

김정은은 왜 승마구락부 지붕에 집착했을까. 비밀은 승마구락부 완공 직후 김정은이 했다는 말에서 풀렸다.

“저 지붕은 내가 위대한 수령님들께 드리는 충성의 경례를 형상화한 것이오.”

지붕의 모양이 강 건너편 금수산태양궁전에 미라로 누워있는 김일성,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모양새라는 뜻이다. 그러면 그렇다고 미리 말하면 될 것을, 김정은의 속심을 알 길이 없던 설계소장만 억울하게 죽었다.

이후에도 다른 건물 설계 때문에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2015년 2월 양각도 과학기술전당의 지붕 모양을 바꾸란 지시에 토를 달았다는 이유로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이 공개 처형된 것이 대표적이다.

역사에는 궁예가 독심술(讀心術)로 남의 생각을 꿰뚫어 본다며 죄 없는 신하들을 마구 죽였다고 기록돼 있다. 먼 훗날 후손들은 ‘21세기의 김정은은 궁예와는 반대로 자기 마음을 읽는 독심술이 없다고 사람을 마구 죽인 캐릭터 이상한 폭군’으로 배울지 모르겠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김정은#승마#북한군 설계연구소#미림승마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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