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면서 대한민국의 앞날에 드리웠던 불확실성의 안개가 걷혔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할 때는 많은 시민·학생이 피를 흘렸다. 30년이 지난 오늘의 한국은 평화로운 촛불로 대통령을 바꿀 수 있을 만큼 민주주의가 성숙했다. 주요 외신들도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지금은 민주 발전을 자축하며 축배를 들 때가 아니다.
안개가 걷히면서 대한민국호(號) 앞에 형체를 드러낸 것은 엄청난 파도다. 새롭게 나타난 파도가 아니라 ‘탄핵 내전’의 포화에 가려 보지 못했을 뿐이다. 외교·안보·경제의 삼각파도가 대한민국호를 때리기 직전이다. 자칫 배를 침몰시킬 ‘퍼펙트 스톰’이 몰려온다. 이 위중한 시기에 배에는 선장이 없다.
한국 외교와 경제가 당면한 가장 큰 위기는 중국의 무분별하고도 무차별적인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이다. 벌써 중국 의존도가 높은 경제의 허리가 휘청거린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최대 보복치를 10으로 보면 1.5∼2 정도밖에 안 나왔다”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에 북한이 사상 최대 규모의 6차 핵실험을 준비하는 정황까지 포착됐다. 미국 본토를 직접 때릴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개발이 임박한 북이 그 탄두에 장착할 핵까지 고도화한다면 김정은 정권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다. 북핵과 미사일 실험은 안보의 가장 심대한 위협이자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주범인 경제위기 요인이다.
경제는 우리의 안보를, 민주화를 지켜온 방파제였다. 그 둑이 흔들리고 있다. 안보의 근간인 한미동맹의 상대방인 미국마저 경제 문제로 우리를 옥죄려 든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인상할 것이란 소식은 1340조 원을 돌파한 가계부채 폭탄의 뇌관이 될 수도 있다. 미국이 우리나라를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해 경제 보복에 나선다면 ‘4월 위기설’은 현실이 될 수도 있다.
언제나 그렇듯, 외부의 적(敵)보다 무서운 건 ‘내부의 적’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위스는 독일군의 침공이 예상되자 알프스의 요충지에 2만3000여 개의 지하요새를 만들었다. 그리고 독일을 향해 “침공하면 오랜 기간 큰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했다. 히틀러는 결국 침공을 포기했다. 스위스는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등 주변 강국에 둘러싸여 한국과 지정학적 여건이 비슷하다. 오늘날의 강소국 스위스를 만든 건 위기 때마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단결해온 전통의 힘이다.
우리는 어떤가. 어제 서울 삼성동 사저로 돌아간 박근혜 전 대통령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다”며 끝내 승복을 말하지 않았다. 가장 유력한 대선 주자인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어제 “진정한 통합은 적폐를 덮고 가는 봉합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국가적 위기에 잘잘못을 따지고 내 편, 네 편을 가르는 것이 온당한가. 다른 대선 주자들도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기보다는 선거 승리에만 급급하고 있다.
대선까지 50여 일, 내우외환(內憂外患)이 중첩된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나라의 명운이 걸렸다. 정치권부터 나서 ‘박 대통령 탄핵이 아니라 정치권 전체에 대한 탄핵’이란 소리를 귀담아듣고, 국론 결집에 힘을 모아야 한다. 박 전 대통령 탄핵에서 보여준 국민의 힘이 위기의 대한민국을 지켜줄 것으로 믿는다. 이번에도 우리는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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