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떠나 서울 강남구 삼성동 사저로 옮기면서 검찰 특별수사본부(특수본·본부장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의 박 전 대통령 수사 속도가 빨라지는 분위기다. 박 전 대통령이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헌법재판소 결정에 사실상 불복 의사를 밝히면서 검찰 안팎에서 조기 수사 여론이 비등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박 전 대통령의 ‘공범’으로 지목한 최순실 씨(61) 등 국정 농단 사건 피의자들의 재판이 시작된 점도 검찰로서는 수사를 빨리 마무리하고 박 전 대통령을 재판에 넘겨야 하는 배경이다.
○ “국론 분열 막으려면 신속 수사 불가피”
박 전 대통령은 사저로 복귀하면서 헌재의 파면 결정에 승복하는 의사 대신 기존의 결백 주장을 되풀이했다. 향후 검찰 수사와 법원 재판에서 치열하게 무죄를 다투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검찰 안팎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이런 태도 때문에라도 하루빨리 조사와 기소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다. 수사가 장기화하면 박 전 대통령의 주장을 지지하는 측에서 검찰 수사에 반발하는 등 잡음이 생길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특수본은 이런 점을 고려해 박 전 대통령에 대해 이번 주중 소환 통보를 하고 불응할 경우 체포영장을 청구하는 방안을 유력하게 검토하고 있다.
최 씨를 포함해 국정 농단 사건 관련자 중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는 사람이 20명이나 된다는 점도 박 전 대통령 조사가 신속하게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법원은 통상 구속 피고인에 대한 재판을 불구속 피고인 재판에 비해 빠르게 진행한다. 검찰로서는 박 전 대통령 조사를 조속히 끝내야 그 결과를 다른 국정 농단 사건 피고인들의 유죄 입증에 활용할 수 있다.
사회 전체적으로 대선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는 점도 검찰로서는 부담이다. 수사가 늦어지면 “검찰이 특정 후보를 도울 목적으로 수사 속도를 조절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검찰, 전직 대통령 소환 사례 검토
검찰은 박 전 대통령 소환을 앞두고 과거 전직 대통령의 소환 조사 사례를 검토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먼저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사람은 노태우 전 대통령이다. ‘5공화국 비리’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은 1995년 10월 30일 밤 노 전 대통령에게 이틀 뒤인 1995년 11월 1일 오전에 검찰에 출두하라고 통보했다. 노 전 대통령은 소환 통보에 순순히 응했다.
경찰은 조사 당일 오전 전경 8개 중대 960명을 노 전 대통령의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사저에 배치했다. 또 이동하는 노 전 대통령을 노린 테러에 대비해 폭발물 탐색견까지 동원해 사저 주변을 샅샅이 수색했다. 같은 시간 검찰청사 안팎에도 600여 명의 경찰 병력이 깔렸다. 검찰도 노 전 대통령 출두 직전에 방호원 60명을 동원해 서울 서초구 서초동 대검찰청 본관 건물 지하 3층부터 15층까지 전체를 수색하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95년 12월 1일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다음 날 검찰청사로 나오라고 통보했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은 검찰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고향인 경남 합천군으로 떠났다.
검찰의 대응은 전격적이었다. 조사가 무산된 당일인 2일 밤 검찰은 법원에서 사전 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전 전 대통령을 합천에서 강제 연행해 안양교도소로 압송했다. 당시 검찰 내부에서는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하루, 이틀가량 시간적 여유를 주자는 의견도 나왔다. 하지만 전 전 대통령이 검찰을 비난한 점에 비춰 볼 때 자발적으로 출석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해 곧바로 구속영장을 집행했다.
두 전직 대통령에 비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의 소환 통보는 비교적 시간 여유를 갖고 이뤄졌다. 2009년 4월 26일 ‘박연차 게이트’를 수사하던 대검 중수부는 노 전 대통령 측에 같은 달 30일 출석하도록 통보했다. 노 전 대통령과 보좌진은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서 조사 장소인 서울의 대검찰청으로 이동하면서 청와대 경호처가 제공한 42인승 리무진 버스를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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