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5월 청와대에서 “이러다간 대통령직을 제대로 못해 먹겠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말했다. 대통령에 취임한 지 불과 3개월 만이었다. 당시 5·18행사추진위원회 간부들과 만나 한총련의 5·18 시위와 전교조의 연가투쟁에 불만을 쏟아내며 한 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4일 두 번째 대국민 담화에서 “‘내가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하는 자괴감이 든다”고 했을 때 나는 노 대통령의 이 말이 문득 떠올랐다.
生則死로 결국 무너져
언뜻 들으면 대통령 자리를 내놓겠다는 말 같지만 내심은 대통령직을 결코 내려놓지 않겠다는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김병준 국무총리 후보자에게 내치(內治)를 맡기겠다는 얘기도 일절 하지 않았다. 국정 운영의 중심은 대통령 자신이라는 것을 확인한 담화문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네 번의 기회를 모두 놓쳤다. 새해 첫날 청와대 상춘재에서 출입기자들을 모아 놓고 “(뇌물죄 의혹은) 완전히 엮은 것”이라고 강변했다. 특검 수사가 옥죄자 1월 25일엔 ‘정규재TV’ 인터뷰에서 “경제공동체라는 말을 만들어 엮어도 너무 억지로 엮은 것”이라고 다시 억울함을 호소했다. 진실 규명은 뒷전인 채 장외 여론전에만 매달렸으니 불타는 민심에 기름을 끼얹은 셈이다. 헌재가 대통령 파면 사유의 하나로 지목한 특검 조사와 헌재 출석 문제에 대해선 “전례를 남겨선 안 된다”는 대통령 말 한마디에 참모들은 하나같이 입을 닫고 말았다.
헌재의 탄핵심판 심리가 이어지는 동안 청와대 참모들은 보이지 않았다. 핵심 측근인 이정현 의원과 유정복 인천시장 등과 수시로 논의했다는 얘기가 들렸다. 헌재의 대통령 파면 결정 바로 전날 탄핵이 기각될 것이라는 보고를 청와대 수석이 올렸다니 주변에 변변한 참모 하나 없었던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은 사즉생(死則生)의 길을 걸어왔던 사람이다. ‘차떼기 당’이란 오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의도에 천막당사를 쳤고, 괴한에게 칼을 맞고도 “대전은요?”라고 선거를 먼저 걱정했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했을 때 깨끗하게 승복하고 이명박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그랬던 그가 청와대에선 생즉사(生則死)라는 잘못된 길을 걷다가 여기까지 왔다. 국민들이 실망한 것은 “내 책임은 하나도 없다”는 대통령의 태도였다.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에 집착하는 모습에 국민은 고개를 돌렸다. 친박(친박근혜) 패권주의는 정치 불신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어두운 그림자’ 어른거린다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청와대 1년을 옆에서 지켰던 사람이다. 권력의 무서움과 비참함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대세론에 취한 문재인 주변에 당장 권력을 잡은 듯 완장부대가 득실대는 것은 어두운 그림자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내각에 “부역행위를 저지르지 말라”고 대놓고 협박하는가 하면 ‘윤병세 졸개들’이라는 험악한 말이 민주당 국회의원 입에서 나왔다. 친문(친문재인) 패권주의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2012년 대선 전까지만 해도 “정치할 생각은 없다”던 문재인이 이번엔 “3수(修)는 없다”며 권력 의지로 넘쳐난다. 선하던 인상이 독하게 바뀌었다고 인상을 평하는 사람도 있다. 주변 사람들이 자꾸 떠나는 것도 좋지 않은 신호다. ‘박근혜의 실패’에서 대선주자들이 교훈을 얻지 못한다면 누가 청와대를 가더라도 국민들은 비참한 대통령의 말로를 다시 봐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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