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은 1979년 10·26사태 이후 집권 과정에서부터 1987년 6·29선언을 통한 정권 이양까지 역사에 숱하게 많은 기록을 남겼다. 그 중심에 선 전두환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온 지 30년 만에 회고록(사진)을 펴냈다. 회고록은 총 25장(章) 1908쪽 분량의 세 권으로 이뤄졌다.
30일 전 전 대통령 측은 다음 달 3일 출간을 앞둔 회고록의 일부를 먼저 공개했다. 전 전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나의 허물을 덮어버릴 수도 없는 것이고, 국민의 채찍도 피할 생각이 없다”며 “나로 인해 생겨난 증오와 분노가 한때의 증오와 분노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관용과 진실에 대한 믿음이 채워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 전 대통령이 밝힌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시각 등을 놓고 다시 한 번 논란이 일 것으로 보인다.
○ “5·18, 어느 순간 ‘민주화 운동’으로 자리매김”
전 전 대통령은 1권 ‘혼돈의 시대’에서 상당 부분을 1979년 12·12쿠데타와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두 사건은 재임 기간은 물론이고 지금까지도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전 전 대통령의 최대 아킬레스건이다.
그는 12·12가 쿠데타로 규정된 것에 대해 “12·12의 희생자라고 생각하는 정승화(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가 정치세력을 등에 업고 12·12를 쿠데타로 몰아가려는 정치적 역사 왜곡”이라고 적었다. 또 “김영삼 정권은 ‘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빚어진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정치 보복극을 연출했다”며 “어쨌든 그들은 12·12를 ‘반란’으로 정죄하는 데 성공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전 전 대통령의 부인 이순자 여사는 최근 펴낸 자서전에서 12·12쿠데타를 ‘국민들과 역사에 대한 책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의리이고 신의’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이어 전 전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과 관련해 “‘내란’으로 판정됐던 광주사태는 어느 날 ‘민주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되더니 어느 순간 ‘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 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군수공장과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한 ‘시민군’이 국군을 공격했던 당시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문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며 “논란이 정리되지 않는 한 그 비극의 상처도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고 썼다. 앞서 이 여사도 자서전에 “광주에서 (계엄군이 소지한) M16에 의한 희생자는 몇 명 안 되고 자기들끼리 싸워 희생된 자가 많다”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논쟁적인 발언을 실었다.
○ “최규하, 자유의사로 하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신군부의 강압으로 퇴진했다는 논란과 관련해 전 전 대통령은 ‘음해’라고 강변했다. 전 전 대통령은 최 전 대통령의 조기 퇴임으로 집권 초기부터 정통성 시비가 끊이질 않았다.
전 전 대통령은 “최 전 대통령을 10·26 이틀 뒤인 1979년 10월 28일 단독으로 처음 뵈었고, 이후 1980년 8월 18일 청와대를 떠나 서교동 사저로 가실 때까지 직접 뵙거나 통화한 일이 모두 70회나 된다”고 강조했다. 최 전 대통령이 자신을 깊이 신임했다는 얘기다. 이어 “그 어른이 음해에 대해 속 시원한 해명 말씀 없이 시종일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꼈다”고 적었다.
또 “그 어른이 후임으로 나를 선택한 것은 그분의 자유의사에 의한 결정이었고, 국가원수로서의 품위와 권한을 유지한 채 사임 여부와 일정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주장했다. 이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2006년 투병 중인 최 전 대통령에게 서신을 썼다고 한다. 최 전 대통령 서거 후 유족이 찾아왔을 때 “내가 최 전 대통령을 협박해 권좌에서 밀어냈다는 소문에 결코 흔들리지 말라. 난세에 그 어른이 내게 쏟으셨던 신뢰와 내가 그 어른께 드린 충정은 아주 특별하고 고귀한 것이었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 “최태민 비행 막으려 군 부대에 격리”
전 전 대통령은 10·26사건 직후 최순실 씨의 부친 최태민 씨를 박근혜 전 대통령과 떼놓기 위해 전방 군부대에 직접 격리 조치했다고 증언했다. 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 재임 당시 청와대에서 경호실 작전차장보를 지내며 최태민의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는 “10·26 이후 영애 근혜 양과 함께 구국봉사단, 새마음봉사단 등을 주도해왔던 최 씨를 상당 시간 전방의 군부대에 격리시켜 놓았다”고 적었다. 최 씨에 대해 “그때까지 근혜 양을 등에 업고 많은 물의를 빚었고 그로 인해 생전의 박정희 대통령을 괴롭혀 온 사실은 이미 관계기관에서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면서 “최 씨가 더 이상 박 전 대통령 유족의 주변을 맴돌며 비행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격리 배경을 설명했다.
2002년 16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한 박근혜 의원이 출마 의지를 보이며 도움을 구했지만 거절한 사실도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은 “박 의원은 내게 사람들을 보내 힘을 보태줄 것을 요청했다”면서 “나는 생각 끝에 완곡하게 뜻을 접으라고 했다”고 적었다. “박 의원이 지닌 여건과 능력으로는 무리한 욕심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박 의원이 대통령이 되는 데는 성공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통령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는 어렵다고 봤고, 실패했을 경우 ‘아버지를 욕보이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전했다”고 밝혔다.
○ ‘40년 지기’ 노태우 전 대통령과의 애증
1987년 6월 29일. 당시 여당인 민정당 노태우 대표는 “이 구상을 대통령 각하께 건의를 드릴 작정”이라며 직선제 개헌을 비롯한 8개항으로 이뤄진 민주화 조치를 전격 발표한다. ‘6·29선언’이다. 전 전 대통령은 6·29선언은 ‘노태우 작품’이 아니라 ‘내 작품’이라고 주장하며 노 전 대통령과의 일화를 자세히 적었다.
그는 1987년 6월 17일 청와대 집무실로 노 전 대통령을 불러 “직선제 수용을 전제로 한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하자 노 전 대통령이 낭패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일언지하에 반대했다고 밝혔다. 이틀 뒤 “직선제로 해도 여당이 승리할 수 있다”며 “노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보다 얼굴도 잘생기고 말도 잘하고 정치에 때가 묻지 않아 신선하다”고 설득하자 수용했다는 것.
하지만 노 전 대통령은 이후 되레 “제가 직선제 수용을 포함한 민주화 조치를 건의하면 각하께서는 크게 노해서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여주면 더욱 효과가 있겠다”며 ‘연출’을 요구했다고 기술했다. 이에 대해 전 전 대통령은 “내가 평가받을 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모든 영광을 노 대표에게 몰아주겠다는데 그것도 모자라 나를 권력 집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인가” 하며 거부했다며 ‘40년 지기’에 대한 섭섭함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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