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전역에 비가 내린 5일. 흐르는 빗물 속에 군사적 긴장과 평화적 스포츠 교류가 기묘하게 교차했다.
오전 6시경 함경남도 신포 인근 해안가. 탄도미사일이 장착된 발사대 인근을 북한군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같은 시각 한미 정보당국의 대북 감청망에 평양 지휘부에서 최종 발사 명령을 내렸다는 북한군의 교신이 포착됐다. 곧바로 정찰위성과 무인정찰기(UAV) 등 한미 감시전력들이 북한 미사일 정밀 추적 작전에 돌입했다. 500km 이상의 우주공간에서 미사일의 화염을 실시간으로 포착하는 우주기반적외선감시위성(SBIRS) 여러 대도 신포지역에 포커스를 맞췄다.
北 신형 중거리미사일 1발 발사
오전 6시 42분. 육중한 크기의 미사일 1발이 하늘로 솟구쳤다. 1분여 뒤 초 단위로 미사일의 비행고도와 사거리를 추적할 수 있는 동해상의 이지스 구축함 레이더와 육상의 그린파인 탄도탄 조기경보 레이더에 미사일의 항적이 포착됐다. 미사일은 약 9분 동안 비행하며 최고 고도 189km를 찍은 뒤 발사 지점에서 60km쯤 떨어진 해상에 낙하했다. 미국 태평양사령부는 북한이 쏜 미사일이 2월 12일 처음 발사한 KN-15 중거리탄도미사일(북극성-2형)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한미 군 당국도 미사일의 화염 크기와 비행 궤도를 고려해 같은 결론을 내렸다.
靑 벙커서 NSC 열어 대응책 논의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에게서 미사일 관련 보고를 받은 뒤 즉각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소집을 지시했다. 황 대행은 오전에 잡혀 있던 경기 양평군 식목일 행사 참석도 취소했다. 오전 8시 30분. ‘지하벙커’로 불리는 청와대 위기관리상황실에서 김 안보실장 주재로 NSC 상임위원회가 열렸다. 미중 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 전략적인 도발에 나선 북한에 대한 대응 방안이 논의됐다.
강릉서 北여자아이스하키팀 경기 北 국가 연주… “우리는 하나” 외쳐 北 미사일 발사 사실 모르는 관중도
미사일이 발사된 지 12시간도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는 북한 국가가 연주되고 인공기가 게양됐다. 청와대와 군이 북한의 도발에 긴박하게 대응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동해와 맞닿은 강원 강릉하키센터에서 오후 4시 30분 북한과 영국의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여자세계선수권대회 디비전2 그룹A(4부 리그) 경기가 열렸다. 북한은 3피리어드까지 2-2로 무승부를 기록하다 연장전 1분 59초에 터진 진옥의 결승골에 힘입어 3-2로 승리했다. 서든데스 제도에 따라 결승골과 함께 경기가 끝나는 순간 북한 선수들은 일제히 빙판 위로 올라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쁨의 함성을 질렀다.
아이스하키 국제대회에서는 승리 팀 국가를 연주한다. 오후 6시 45분 북한 국가가 울려 퍼졌다. 한국에서 열린 스포츠 대회에서 북한 국가가 연주된 것은 2014년 인천 아시아경기 이후 처음이다. 북한 국가가 흘러나올 때 1600여 명의 관중은 기립했다. 일부 관중은 신기한 듯 인공기가 게양되는 장면을 휴대전화에 담았다. 경기 내내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와 6·15강원본부가 주도해 결성한 남북공동응원단 230여 명은 하늘색 한반도기가 그려진 흰색 티셔츠를 입고 “통일조국” “우리는 하나”를 외쳤다. 구슬프게 ‘아리랑’을 부르다 흥겨운 북한 노래 ‘반갑습니다’를 율동과 함께 따라했다. 이창복 남북공동응원단 단장은 “2월 중국에서 6·15공동선언실천북측위원회 위원장인 박명철 전 체육상과 만나 남북이 체육교류를 할 때 함께 응원하기로 합의했다”며 응원단 발족 배경을 설명했다. 관중 가운데는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한 사실을 모르는 이도 있었다.
경기가 끝난 뒤 북한 선수들은 관중석을 향해 여러 차례에 걸쳐 고개를 숙였다. 스틱을 들어올리며 감사함을 표시했다. 눈을 마주칠 수 있는 동안은 계속해서 응원단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앞선 두 경기에서 잇달아 지면서 국내 취재진과 눈도 맞추지 않은 채 경기장을 빠져나갔던 북한 선수들이었지만 이날만큼은 활짝 웃는 얼굴로 취재진을 맞았다.
김일성경기장서 南여자축구 경기 “평소보다 애국가 더 크게 불렀다”… 5000여 평양관중 대부분 인도 응원
“관람자 여러분, 인디아 팀과 대한민국 팀 선수들이 입장하겠습니다.” 북한 여자아이스하키 대표팀이 경기를 마칠 무렵인 오후 6시 30분.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는 김일성경기장에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선수들과 함께 태극기, 인도 국기, 그리고 아시아축구연맹(AFC)기도 그라운드에 등장했다. 아나운서는 말을 이어갔다. “대한민국 국가를 연주하겠습니다.” ‘북한 축구의 성지’ 김일성경기장에 처음으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이었다.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은 이날 오후 6시 30분부터 인도를 상대로 2018 요르단 아시안컵 B조 예선경기를 치렀다. 장소는 미사일 최종 발사 명령이 나온 평양이었다.
5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김일성경기장은 능라도경기장과 함께 북한을 대표하는 운동장이다. 평양 개선문에서 200m가량 떨어져 있다. 경기장 내부 복도에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8강 등 북한 축구의 역사를 보여주는 대형 사진이 전시돼 있다. 그라운드 안 광고판은 ‘메아리음향사’ ‘아침콤퓨터합영회사’ 등 북한 기업들의 광고 일색이었다. 국제대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로벌기업들의 광고판은 없었다.
북한축구협회는 1월 AFC에 2018 아시안컵 예선 B조 조별리그 경기를 통째로 유치하겠다고 신청해 승인받았다. 그 뒤 한국이 조별리그 추첨에서 B조에 속하게 돼 북한과 맞붙게 됐다. 북한에서 남북이 축구 대결을 하는 것은 1990년 이후 27년 만이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규정에 따라 경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양국 국기가 그라운드에 입장하고 국가도 연주된다. 그동안 북한은 태극기 게양, 애국가 연주 등에 부담을 느껴 안방에서 개최해야 하는 남북 경기를 제3의 장소에서 열곤 했다.
이날 먼저 열린 북한-홍콩 경기 때는 1만3500여 명이 김일성경기장을 찾았다. 최룡해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도 본부석을 지켰다. 한국과 인도의 경기가 열리는 동안에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관중석 상단을 중심으로 5000여 명의 관중만 남았다. 한국이 전반을 5-0으로 마친 뒤에는 다시 절반이 빠져 나갔다. 남은 관중 대부분은 인도를 응원했다. 강력한 경쟁자인 한국이 인도를 상대로 더 많은 골을 넣는 게 북한에는 불리하다. 북한이 8-0으로 이긴 인도를 한국은 10-0으로 이겼다. 3골을 넣으며 승리에 앞장선 이금민(서울시청)은 “평양에서 부른 애국가는 왠지 슬프게 들렸다”고 했다. 1골을 추가한 이민아(현대제철)는 “선수들과 ‘평소보다 애국가를 더 크게 부르자’고 이야기했다. 각별한 경험이었다”고 전했다.
정치는 정치이고 스포츠는 스포츠인 걸까. 공존하기 어려워 보이는 일들의 연속이 한반도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하루였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