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지영]복면가왕을 기다리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6일 03시 00분


김지영 문화부 차장
김지영 문화부 차장
‘개봉열독’이 화제다. 신간의 제목과 표지를 모두 가리고 인터넷 서점에서 예약판매를 실시하는 이벤트다. 행사를 시작한 지난 주말 이틀 만에 1000권 가까이 팔려 나가자 이벤트를 주관한 출판사들도 놀라워하는 눈치다. “인터넷서점은 주말 배송이 없어서 보통 주말 주문이 많지 않은데 의외의 반응”이라며 출판사들은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독자 입장에선 책의 제목도, 저자도, 내용의 일부도 모르는 채 주문하게 된다. 그야말로 ‘복면도서’라고 불릴 만하다. 참여한 출판사의 책들이 대개 태작이 없었다며 예약구매를 한 독자들은 “어떤 책을 받을지 궁금하다”는 반응이다.

때마침 ‘복면가왕’이 2주년을 맞았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노래 실력을 겨루는 TV 프로그램이다. 목소리와 몸짓만으로도 복면 너머 얼굴을 금세 맞힐 수 있는 가수들도 있지만, 복면을 벗은 얼굴이 의외의 인물일 때 “저 사람이 저렇게 노래를 잘했다니” 하면서 느끼는 반전(反轉)의 놀라움도 크다.

반전은 현대 서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키워드다. 이 용어는 당초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사용됐다. 행복해 보이던 인물이 갑자기 불행해진다거나, 불행했던 인물이 갑자기 행복해진다거나 하는 글의 구조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런데 19세기 중반 추리소설이 등장하고 이후 활발하게 창작되면서 반전에 큰 의미가 부여됐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결말이 얼마나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지, 독자들에게 얼마나 큰 놀라움을 주는 반전이 결말에 있는지가 현대 서사 창작의 관건이 됐다. 지팡이 휘두를 힘도 없어 보이는 할머니를 향해 “당신이 범인이야!”라고 명탐정이 지목할 때의 충격 말이다. 생각해 보면 최근 수년 새 우리나라가 겪은 가장 큰 반전은 ‘최순실 국정 농단’일 것이다. 있지 말았어야 할 반전이었다.

반전이 현대에 부각된 데 반해 서사의 또 다른 키워드인 ‘성장(成長)’의 역사는 오래됐다. 기원전 700년경에 쓰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나 구비문학으로 전해오는 우리나라의 바리데기 설화 등이 그렇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모두 바라는 것을 이루고자 오랜 방랑의 시간을 거친다. 집에 돌아가고자 하는 오디세우스,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약을 구하려는 바리데기는 모두 목숨이 위협받는 고난에 부대끼지만 이를 이겨낸다. 결말에서 주인공들이 얻는 것은 처음의 목표뿐 아니라 변화하고 성장한 자기 자신이다. 서사를 감상하면서 주인공의 모험에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독자(혹은 관객)의 카타르시스도 크다.

반전의 충격, 성장의 감동이 함께하는 서사는 자연히 흥행할 가능성이 높다. 두 가지 키워드를 한데 엮은 훌륭한 문화상품 중 하나로 ‘슈퍼맨’이 꼽힌다. 슈퍼맨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고 악인들과 싸우면서 부여된 사명을 받아들이게 된다. 커다란 안경과 어딘지 모자란 듯한 표정이라는 복면이 벗겨지면 슈퍼맨이 된다는 설정도 그렇다. 반전은 예상을 초월하는 슈퍼맨의 능력이다(그는 심지어 지구를 거꾸로 돌아 죽었던 여자친구도 살려낸다). 최근 ‘맨 오브 스틸 2’의 제작이 확정되는 등 이 영화가 2000년대에도 계속 만들어지는 건 이렇듯 ‘반전과 성장’의 서사가 함께하는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

선거가 다가올 때마다 슈퍼맨을 떠올리게 된다. 상처도 입고 어려움도 겪지만 종내 극복하는, 막연한 기대를 걸지만 그 기대를 예상치 못하게 훌쩍 뛰어넘는 주인공 말이다. 한 달 남짓 남은 이 선거에서 얼마나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질지 가늠할 수 없지만, 어떤 이가 지도자로 세워지든 그가 긍정의 반전과 성장의 서사를 계속 써나가기를 기대한다. 선거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이다.

김지영 문화부 차장 kimjy@donga.com
#개봉열독#복면가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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