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변한 공약집도 내놓지 못하면서 숫자 얘기만 나오면 기획재정부 국장급이라고 깎아내리는 게 말이 됩니까?”
정부세종청사에서 27일 만난 기재부의 한 국장은 기자가 사무실에 들어가자 대뜸 이런 말을 했다. 최근 토론회마다 이어지는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기재부 국장’ 레퍼토리에 속이 상하다고 하소연했다. 예산이나 정책 논의를 할 때마다 다른 부처들이 기재부를 비판하는 것도 못내 서운한데 연일 기재부 관료를 ‘속 좁은 숫자쟁이’로 취급하는 대선 후보의 발언을 듣는 게 편하지 않다는 것이다.
홍 후보가 ‘기재부 국장’이라는 표현을 처음 꺼낸 것은 19일 열린 스탠딩 TV토론회였다.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가 국민연금 소득대체율을 40%에서 50%로 올리겠다는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증세 계획이 불분명한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에게 맹공을 퍼붓자 이를 지켜보던 홍 후보가 “세 분 토론하는 걸 보니 기재부 국장들끼리 논쟁하는 것 같다”며 비꼰 것이다. 홍 후보는 이후 여러 토론회와 유세장에서 “대통령은 경제 철학과 사상, 통치 철학을 갖고 덤벼야 한다. 수치 하나 따지는 건 기재부 국장이나 할 짓”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이라면 응당 올바른 국정 철학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철학을 공약으로 내놓을 때는 반드시 숫자가 뒷받침돼야 한다. 공약을 지키는 데 돈이 얼마나 들고, 돈은 어떻게 마련할지 ‘공약 가계부’를 제시해야 한다. 공약은 세금과 나랏빚으로 재원을 마련해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국민의 호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이다.
주요 대선 후보들이 제대로 된 공약 대차대조표 하나 내놓지 못하고 명확하게 숫자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기재부 국장에게 짐을 떠넘기는 모습을 보이는 건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선 후보 지지율 1위인 문 후보가 본인의 1순위 공약에 얼마가 들어가는지 속 시원히 설명하지 못하는 모습도 씁쓸하긴 마찬가지다. 문 후보는 재원이 과소 추계됐다는 유 후보의 지적에 “일자리 공약은 우리 정책본부장과 토론하라”며 검증 자체를 피했다. 이튿날 문 후보 측 정책본부장이 “5년간 17조 원이면 17만 명을 채용하는 데 충분하다”고 설명했지만 5년 뒤에 얼마가 들어갈지, 그 재원은 누가 부담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을 꺼내지 않았다.
대선 토론회는 국민에게 공약의 실현 가능성을 검증받는 자리다. 기재부 국장, 정책본부장에게 숙제를 미루는 것은 책임 있는 대통령 후보자의 자세가 아니다. 치밀한 논리를 바탕으로 본인의 약속을 지키는 데 쓰일 소요 재원과 재원조달 방안을 명확하게 제시해야 한다.
국민들은 증세 없는 복지를 약속했던 박근혜 정부가 기초연금, 무상보육 등 대규모 복지 공약을 끝내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허술한 ‘공약 가계부’의 뒷감당은 결국 세금을 내는 국민들이 짊어져야 한다. 마침 오늘, 대선 후보들은 경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갖는다. 이번에야말로 똑 부러지는 논리와 명확한 숫자로 정면승부를 보여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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