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훈 前대법원장 “대통령은 수석 청지기… 지지 안한 국민도 껴안아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일 03시 00분


[대선 D-8/원로에게 길을 묻다]약자 보듬는 마음을 지닌 ‘국민 통합’ 대통령 나와야
사회 부조리 낳는 제도는 청산… 사람 자체를 미워해선 안돼
재벌도 국가경제에 이바지… 때려죽일 사람 취급 안돼
인촌 선생 대법원 판결 아쉬워… 일부 자료로 삶 전체 판단 지나쳐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30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 대통령은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았던 국민과도 소통하고 배려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통합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30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음 대통령은 자신에게 투표하지 않았던 국민과도 소통하고 배려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고 ‘통합의 리더십’을 강조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대통령은 선출되는 즉시 모든 국민의 수석 청지기가 돼야 한다.”

이용훈 전 대법원장은 30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국민을 다 아울러서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 국민 모두가 주권자인 것이지 자신을 지지한 사람만 주권자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다수결만 생각한다면 51%의 독재에 불과하다. 나머지 49%의 국민들도 아울러서 가야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명제에 부합하는 것”이란 설명이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이 전 대법원장은 15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뒤 대법관,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을 거쳐 노무현·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5년 9월부터 2011년 9월까지 14대 대법원장을 지낸 원로 법조인이다.

―대통령 탄핵을 거치면서 우리나라가 ‘촛불’과 ‘태극기’로 너무 갈라져 있다.

“국민들은 의견이 나누어질 수 있다. 하지만 지도자가 어느 한편을 위해 정치를 하면 불행한 사회가 된다. 어느 한편만 생각하면서 국정 운영을 하면 불행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차기 대통령에게 필요한 덕목이나 자질은 무엇일까.

“TV토론에서 토론 잘한다고 대통령을 잘하는 건 아니고,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삶의 궤적을 잘 살펴봐야 한다. 태도나 심지가 중요하다. 대통령은 어려운 사람들의 삶을 보살필 줄 아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말도 잘하면 금상첨화이긴 하지만…. 그걸 (TV토론으로는) 알 수가 없으니 참 고민이다.”

―새 정부는 국정 운영을 시스템화하고 법치를 바로세우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사인(私人)이 국정에 개입해 농단하는 것을 제도적으로 막는 건 해야 한다. 백번이라도 해야 한다. 어떤 한 사람이 커튼 뒤에서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정권은 없어져야지. 사회 부조리를 가져오는 그런 제도적인 적폐는 청산돼야 한다. 그렇지만 그게 사람을 청산하는 건 아닐 거다. 그건 법이 할 일이지 정치가 할 일은 아니다. 사람을 미워해선 안 되고 국민통합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자기한테 투표한 사람들만 국민이라고 생각하고, 그 사람들로부터 권력을 부여받았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다음 대통령이 자신에게 투표한 국민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투표하지 않았던 국민과도 소통하고 배려하는 정치를 해야 국가가 제대로 가는 것이다. 심지어 감옥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국민의 한 사람 아닌가.”

―선거 막판 다시 보수, 진보 간 대립 양상이 벌어질 조짐도 보인다.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라고 설득해서 온 국민이 뜻을 합해서 나아가는 정치가 돼야 남북 대치 상황을 제대로 헤쳐 나갈 수 있다. 편을 갈라서 될 일이 아니다. 보수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은 노조에 대해서 너무 심한 말을 내던져서 감정 상하게 안 했으면 좋겠다. 반대로 재벌이라는 사람들도 국가 경제에 이바지하는 게 있는데 때려죽일 사람처럼 취급하면 안 된다. 공은 공대로 인정하고 과에 대해서는 사법절차에 따라 엄격하게 처리하는 것이다. 언제까지 싸우고만 있을 건가.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들이 말을 조심해야 한다.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지 않고, 양보하지 않고,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게 문제다.”

―안보 이슈도 불거지고 있다.

“사드 때문에 그런가. 사드 배치를 해서 (그것만 갖고) 남북이 정말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이 없는 평화체제를 구축할 수 있겠느냐는 참 어려운 문제다. 남북관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남과 북이 서로 공격하지 않고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하는 거다. 그것은 정말 협상과 외교로 이뤄질 일이지 무기를 갖고 완벽하게 될지는, 참 걱정이다. 그렇다고 무기가 완전히 열세에 있으면 상대가 만만하게 볼 테고. 두 가지를 잘 병행해야 할 일이다.”

―세대 갈등 우려가 많다. 왜 이렇게 심해졌을까.

“지금 젊은 세대는 권위주의 시대를 경험한 일이 없다. 그 사람들은 민주화된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고 자유로운 생각을 한다는 게 대견스럽다. 나이 든 사람들은 항상 훨씬 더 정의로운 것처럼 생각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 안 한다. 촛불 든 젊은 사람들 얼마나 질서정연하게 시위를 했나. 그걸 보면서 우리 사회가 잘 발전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 협치(協治)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협치하지 않으면 제대로 국정 운영을 하기 어려워 보인다.

“권력을 나누어 갖자는 의미의 협치라고 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사결정을 하더라도 국민을 설득해서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정치로 국정이 운영된다면 그게 협치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날치기해서 밀어붙이는 게 아니라 마지막까지 설득해서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권력 분산에 초점을 맞춘 협치가 많이 논의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런 방향은 이상하지 않은가. 협치라는 것은 자신들이 내세운 정책이 전체 국민을 위해 유익하다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권력을 나눠 갖기만 한다면 오히려 의사결정이 지체되고 어려움이 많을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제대로 된 국민주권 원리를 실현하려고 한다면 상대방을 설득해서 그 결과가 국정에 반영돼야 한다. 민주적 국민주권의 원리는 모든 국민을 일컫는 말이지 51%의 국민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게 민주주의 사회다. 내 얘기가 일종의 공상(空想)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실제로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국회의원들을 불러서 밥도 같이 먹으면서 설득하는 과정이 지루하게 계속되고 있지 않은가.”

―당장 대통령 선출 직후 첫 내각을 구성할 때부터 대선에서 패배한 쪽의 반대로 새 정부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걱정도 많다.

“독일은 연정을 하면서 시행할 정책을 합의해 수백 페이지의 합의서를 만든다고 한다. 연정하는 기간 동안 그걸 다 실현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런 협의 과정 없이 국정이 운영되는 게 문제다.”

이 전 대법원장은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파면 결정이 법원이나 검찰에 많은 시사점을 준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대선 후 수장이 바뀌는 대법원과 헌재가 어떤 모습을 갖추면 좋겠느냐는 물음에 “탄핵 재판을 하는 걸 보면서 우리나라도 민주주의 경험이 축적돼서 정치권력이 법률적 판단 문제를 좌지우지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판관 중에 정권과 연고가 있는 사람도 있었을 텐데 8명 전원이 파면 결정을 과감하게 결단하는 걸 보면서 나도 깜짝 놀랐다”고 했다. 촛불 집회 당시 법원이 시위대의 청와대 앞 행진을 허가한 것에 대해서도 “송두리째 막았다면 폭력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다. 판사들이 지혜롭게 잘했다 생각한다”며 긍정적인 평가를 내놨다. 또 “우리나라는 대통령을 군주로 생각하는 게 있었는데, 탄핵 이후 그런 사고도 바뀌지 않을까. 5년 단임제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도 많지만 국민들이 대통령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거 같다. 5년마다 대통령이 바뀌고 문제가 생겨서 비난도 받고 하면서…. 민주주의 소양이 점점 증대되는 한 우리 사회는 좋은 방향으로 가지 않을까 생각한다. 탄핵이 그런 점에 있어선 국민 계몽에 큰 역할을 한 거다”고 했다.

이 전 대법원장은 대선 후보들과는 특별히 내세울 만한 개인적인 인연은 없다고 했다. 다만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경우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 때 변호인단으로 만난 적이 있다고 했다.

―탄핵 심판 때 만난 문 후보는 어땠나.

“법조계에선 속과 겉이 다르지 않다는 평이 있었다. 원래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데…. 내가 사법연수원 교수 할 때 연수원생이었다. 차석으로 졸업했는데 전과(1975년 6월 특수공무집행방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가 있어서 판사가 못 됐지만 원래는 판사를 하고 싶어 했다고 하더라.”

인터뷰가 끝날 무렵, 인촌 김성수 선생에 대한 얘기도 꺼냈다.

인촌기념회 이사장이기도 한 이 전 대법원장은 최근 인촌 선생과 관련한 대법원의 확정 판결에 대해 “판결이 끝났으니 할 말은 없지만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하는 대목이 아닌가 싶다. 우리나라가 근대화된 사회로 발전해가는 데 큰 공을 세운 분 아니냐. 일제강점기 민족 역량을 기르기 위해 자기 재산을 헌납해서 산업 교육 언론에 큰 축을 만든 분인데…”라며 아쉬워했다.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도 인촌 선생에 대해선 문제 삼지 않았다. 지금 와서 일제 당시 불분명한 몇몇 자료를 갖고 인촌 전체 삶의 궤적을 판단하는 건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관련 법이 그런 부분에 대한 평가와 배려를 담지 못했다. 말하자면 좌우 갈등의 소산이다”면서 “인촌이 가슴 아프지 않을까. 살아계시다면…”이라고 말했다.

전성철 dawn@donga.com·강경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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