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끔찍한 협정’으로 규정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오후(현지 시간) 미국이 맺은 모든 무역협정을 전면 재검토하라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발효된 지 5년이 지난 한미 FTA도 미국 측이 재협상 테이블에 올릴 가능성이 커졌다.
미국은 재협상에서 쌀과 자동차에 대한 추가 개방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진다. 미국의 무역적자가 크게 늘어난 기계 철강 등에 대해서도 관세율 조정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일부 산업의 관세율이 오르는 것만으로 한국의 수출손실액이 약 19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번 행정명령에 따라 미 상무부와 무역대표부(USTR)는 180일 안에 규정 위반이나 남용 사례가 있는 무역협정을 조사해 해결책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다. 윌버 로스 미 상무장관은 전날 백악관에서 열린 관련 브리핑에서 “FTA를 맺고 있는 한국과의 무역적자는 277억 달러로 문제인 미국 전체 무역적자 7000억 달러의 3.8%에 달한다”고 언급했다. 한미 FTA도 주요 조사 대상 중 하나임을 명확히 한 셈이다.
워싱턴의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의 제프리 쇼트 선임연구원은 한미 FTA 재협상이 개시될 경우 “미국 측이 자동차와 쌀에 대해 새로운 쿼터를 요구하고 노동·환경 등과 관련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논의했던 규정들도 추가로 요청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어 “한미 FTA를 다시 협상하는 과정은 어렵고, 한국의 새 정부에도 정치적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미국 측이 자동차·자동차부품, 기계, 철강 산업 등에 대한 관세율 조정에 나설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최남석 전북대 무역학과 교수는 “미국 측이 무역적자 급증 산업에 대한 관세율 조정이 이뤄지도록 한미 FTA 개정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한국경제연구원이 관세율이 조정될 것을 전제로 분석한 결과 올해부터 2021년까지 5년 동안 한국의 수출손실액이 최대 169억9300만 달러(약 19조3720억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다. 이는 한미 FTA 체결 이후 연평균 무역적자 증가액이 2억 달러(약 2280억 원) 이상인 자동차·자동차부품, 기계, 철강 산업에 한정해 관세를 조정한다고 가정해 추정한 결과다.
정부의 고민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지난달 28일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북핵 관련 장관급 회의와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에 참석했던 한국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FTA 폐기’ 가능성 언급에 대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대비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미 FTA 개정 등을 위해선) 의회 통보 같은 절차가 필요하고,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처럼 한미 FTA보다 우선순위에 있는 것들도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재협상이 기정사실화한 만큼 통상 당국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TPP를 깬 미국이 TPP에 들어가 있는 많은 내용을 NAFTA 재협상에 집어넣고 있다. 한국이 TPP 가입을 위해 준비했던 것들을 한미 FTA 재협상에서 협상 카드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미국에서 요청하는 내용을 차근차근 봐가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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