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언론만 보면 한국의 대통령선거는 이미 끝난 것 같다. 대선은 분명 9일인데 미국의 주요 매체는 물론이고 지구 반대편 뉴질랜드헤럴드라는 신문도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승리를 기정사실처럼 쏟아낸다.
대한민국 최초의 정책쇼핑몰을 내건 ‘문재인1번가’에서도 “세계가 진짜를 알아본다”며 타임, 워싱턴포스트, 무디스 기사를 e메일로 보내왔다. ‘워싱턴포스트―자주적 외교노선을 탈 수 있는 지도자’라는 홍보물의 원문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곳곳이 지뢰밭이었다.
‘문재인 후보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 관련 이슈에서 상당 부분 입장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양국의 동맹 관계에는 크게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했다’고 소개했지만 기사 전체의 느낌은 다르다. 문재인이 대선 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가 서둘러 배치된 점을 언급하면서 ‘미국의 행동은 워싱턴에 대한 한국인의 믿음을 훼손하고 안보동맹을 복잡하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는 내용도 있어 어느 쪽이 한미동맹을 흔들지 걱정될 정도다.
‘무디스―국가신용등급을 올릴 수 있는 경제대통령’이라는 홍보물엔 의도적 왜곡도 엿보인다. ‘무디스는 한국이 북한과 효과적으로 대화를 재개한다면 국가신용등급에 긍정적 효과를 끼칠 것으로 판단한다’고 번역해놨으나 바로 뒤 ‘하지만 이것(대화 재개)은 우리의 기본 시나리오가 아니다’라는 부분은 번역하지 않았다. 무디스가 대화 재개 가능성을 높게 안 본다는 대목을 쏙 빼놓은 거다.
이번 한국 대선은 7일(현지 시간) 치러진 프랑스 대선과 함께 글로벌 함의를 지닌다고 뉴스위크는 분석했다. 트럼프가 마침내 북핵을 끝장내겠다고 결기를 드러낸 상황인 데다 지난해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와 미국 대선을 휩쓴 포퓰리즘 열풍이 한국까지 상륙할지를 가늠하는 무대여서다.
외국 주요 매체들은 친(親)유럽연합, 세계화와 자유주의, 시장개혁 성향의 중도파 에마뉘엘 마크롱의 당선을 예측하며 안도감을 내비치고 있다. 트럼프 출현이 반면교사가 돼 ‘프랑스 퍼스트’를 외친 포퓰리스트 마린 르펜을 막고 있다는 얘기다. 그 트럼프가 한국에선 ‘국익 우선’을 강조한 문재인의 당선 가능성을 높였고(파이낸셜타임스), 바로 그 매체들이 문재인에 대해선 불안감을 감추지 않는다는 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일이다.
문재인은 노무현 정부에서 복무해 북핵에 일정 부분 책임이 있는데도(월스트리트저널) 햇볕정책으로 돌아갈 방침이어서 트럼프의 두통거리가 될 것(뉴스위크)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트럼프가 좋아한다는 폭스뉴스는 심지어 “미국과 중국이 북한을 압박해도 한국이 협력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런 동맹을 대신해 핵무장한 미친놈과 벼랑 끝까지 가자고 미국인들을 확신시키긴 어렵다고 일갈했다. ‘꼬마 난입사건’ 생중계로 유명 인사가 된 로버트 켈리 부산대 교수가 “화해정책이 한국을 글로벌 아웃라이어로 만들 수 있다”고 한 경고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6년 북한의 첫 핵실험 뒤 미국이 유엔 안보리에서 대북 제재안을 통과시켰으나 한국이 뒷다리를 잡고 중국이 화낼까 두려워 실패했다는 게 헤리티지재단 브루스 클링너의 지적이다. 문재인은 ‘이명박·박근혜의 북핵 대응은 완전 실패’라고 주장하지만 햇볕정책 10년간 북으로 흘러간 현금이 북한 정권을 살렸음을 부인하진 못할 것이다. 이란이 손들고 협상에 나오기까지 세컨더리 보이콧 3년이 걸렸다. 개성공단을 열어놓은 채 다른 나라에 대북제재를 촉구할 순 없다. 그런데도 개성공단 20배 확대부터 강조하는 문재인을 북한은 쌍수 들고 환영할 것이 분명하다.
15년 전 ‘반미면 어떠냐’고 했던 노무현 대통령 당선 뒤 미국은 미군 1만2500명 감축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새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재검토하거나 방위비 분담을 문제 삼는다면 미군 전격 철수가 단행될 가능성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전시작전권을 회수해 자주국방해야 한다고? 분수 모르는 외교·안보 정책이 바로 적폐다. 중국과의 관계를 리셋하면 된다고? 르펜이 러시아와 관계 개선하자는 것과 비슷한 소리 아닌가.
그래도 다행인 건 대선의 진짜 투표가 내일이라는 사실이다. 영국 BBC는 문재인이 대통령 되면 망명해야 한다는 탈북자들을 소개하며 한국의 대선이 먹고사는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바라건대 문재인이 바뀔 수 없다면 외교 안보 브레인이라도 바꿨으면 한다. 아니면 유권자들이 생각을 바꾸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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