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호경의 B급 뉴스]새 정부 출범 첫날,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추억하며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0일 15시 50분


이임순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위)와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아래).
이임순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교수(위)와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아래).
대통령 선거 사흘 전 지인들과 술을 마셨다. 대선으로 시작된 정치 이야기는 ‘최순실 씨(61) 국정농단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공교롭게도 이날 모인 지인 모두 이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과 인연이 있었다.

최 씨 일가의 주치의로 알려진 이임순 순천향대병원 산부인과 교수(64·여)의 제자 A 씨, 박근혜 전 대통령 자문의였던 정기양 연세세브란스병원 피부과 교수(58)의 제자 B 씨, 청와대 의무실에서 근무했던 두 간호장교의 지인 C 씨까지. 금융회사를 다니는 지인 D 씨는 안종범 전 대통령 정책조정수석비서관(58)의 성균관대 교수 시절 제자였다. 다들 상대방의 인연을 흥미로워하며 평소 그들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었다.

● ‘국정농단 사건’ 안주 삼은 술자리


D 씨는 “안 전 수석의 강의는 워낙 인기가 많아 수강신청 경쟁이 치열했다”고 전했다. C 씨는 청와대 의무실에 근무한 간호장교 2명 중 조여옥 대위는 선후배를 통틀어 실력이 뛰어난 ‘에이스’였다고 했다. 그는 조 대위가 ‘박 전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 열쇠를 풀 인물로 주목받으면서 자신의 이름이 연일 언론에 대서특필되는 상황에서도 미국 연수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의사 지인들은 출신 대학이 달랐지만 자신의 스승에 대한 평은 같았다. ‘전공의가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높은 분’이라고 했다. A 씨는 복도에서 교수가 보이면 마주치지 않으려 일부러 오던 길을 되돌아간 적도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유명한 산부인과 여의사이자 학계에서도 영향력 있는 원로 교수다. 정 교수는 연세세브란스병원 피부과장이자 연세대 의대 피부과학교실 주임교수다.

그 다음은 내 차례였다. 난 국정농단 사건 당시 ‘비선 진료’ 의혹을 취재했다. 기사에 담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냈다. 국내 최고 의사들의 거짓말이 주된 화두였다. 가장 생생한 기억은 지난해 말 이 교수와의 전화 통화였다.

당시 이 교수는 최 씨 일가의 주치의이자 우병우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50)의 아들을 받은 산파 의사로 알려지면서 두 사람을 잇는 연결고리가 아니냐는 의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어디까지나 가까운 의사-환자 관계였을 뿐 자신은 국정농단과 무관하다고 했다. 워낙 유명한 산부인과 여의사다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얼마 안 가 상황이 달라졌다. 박 전 대통령 주치의였던 서창석 서울대병원장(56)이 박 전 대통령을 비선 진료한 의사 김영재 씨(57)와 부인 와이제이콥스메디칼 박채윤 대표(48·여)를 자신에게 소개한 사람으로 이 교수를 지목했기 때문. 해명을 듣고자 이 교수를 찾아갔지만 부재 중이었다. 대신 전화는 받았다.

―서 원장과 친분 있나.

“학회 활동을 같이 했을 뿐 출신 학교가 달라 말을 터놓고 할 사이가 아니다.”

―서 원장과 통화한 적 없나.

“잘 알지도 못하고 통화한 적 없다.”

―서 원장에게 박채윤 씨 소개했나.

“나랑 관계없다. 제가 그 정도로 힘 있는 사람이면 이미 한 자리하지 않았겠나.”

● 국내 최고 의사들의 ‘거짓말’

이 교수는 다음 날 2차례 전화통화에서도 모든 의혹을 부인했다. 그는 “제 실명까지 나와 환자 진료에 지장이 있다. 몇몇 언론사에 수정 요청을 했다”며 억울해했다. 마지막으로 “특검 수사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는 말까지 남겼다.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서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모두 거짓이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 결과 이 교수는 서 원장에게 박채윤 대표를 소개한 것은 물론이고 잘 알지 못한다던 서 원장과 1년간 321차례 통화했다. 그는 최순실 씨의 부탁을 받고 서 원장에게 보건복지부 등 정부 요직 후보자 추천을 부탁했다. 또 대통령 주치의, 서울대병원장 선출에도 개입한 정황이 드러났다.

정기양 교수 역시 거짓을 말했다. 그는 국회 청문회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리프팅 시술을 해주기로 계획한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특검에 따르면 그는 2013년 당시 주치의였던 이병석 연세세브란스병원장(61)과 함께 박 전 대통령의 여름 휴가를 앞두고 ‘뉴 영스 리프트’ 시술을 하려고 계획했다. 이 시술은 김영재 씨가 개발한 안면 리프팅 실을 이용한 주름개선 시술이다.

각종 의혹에 침묵하다 뒤늦게 진실을 말한 인물도 있다. 서창석 서울대병원장이 그랬다. 그는 지난해 11월 말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와이제이콥스메디칼의 연구에 자신이 공동 연구자로 이름을 올린 사실이 드러나면서 불거진 의혹을 해명하는 자리였다. 당시 그는 여러 의혹에 적극 해명하면서도 와이제이콥스메디칼을 알게 된 경위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이임수 교수가 소개해준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넘겼다. 그러다 국회 청문회가 열리기 며칠 전 이 교수가 소개해줬다고 폭로했다. 국회 청문회에서 이를 두고 이 교수와 진실공방을 벌였다.

아마 서 원장은 이 교수를 비호하려다 오히려 자신이 궁지에 몰리자 폭로를 택했을 것이다. 서 원장은 이 교수에게 ‘빚’이 있었다. 자신을 대통령 주치의로 추천하고 서울대 병원장 선거에 출마하라고 독려한 인물이 이 교수였기 때문이다. 서 원장은 특검 조사에서 자신이 주치의 시절 이 교수가 대통령의 증상을 알려줬다며 “실제 주치의는 이임순이라고 생각했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진실은 ‘한줌’도 되지 않았다. 그는 줄곧 이 교수가 자신을 대통령 주치의과 서울대병원장이 되는 데 도움을 준 점, 자신이 이 교수의 부탁을 받고 정진엽 복지부 장관 등 각 부처 인사 후보자를 추천해준 사실은 함구했다. 사건에 대한 관심이 식은 뒤에야 특검 조사에서 모든 진실을 털어놓았다.

● ‘빽’이 통하는 사회 청산되길

술자리가 깊어가면서 우리는 누가 더 나쁜 사람인지 저울질해봤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자의 요구가 잘못됐다는 걸 알더라도 이를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그렇다보니 국정농단 사건이 드러나기 전에 저지른 행동에 대한 판단은 선뜻 내리지 못했다. 대신 갑론을박 끝에 거짓말을 했는지를 판단의 잣대로 삼기로 했다. 국정농단 사건 전모가 드러난 뒤에는 분명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었다. 청문회는 잘못을 인정하고 진실을 밝힐 마지막 기회였다.

조 대위는 청문회에서 진실을 말했기 때문에 저울질의 대상에서 제외됐다. 안 전 수석은 청문회에 불출석했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가 꼼꼼히 남긴 메모가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중요한 증거가 된 점은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결국 국회 청문회에서 거짓 증언을 한 이 교수와 정 교수가 가장 비도덕하다고 결론지었다. 이들은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리고 전 국민을 속였기 때문이다.

이 교수와 정 교수는 국회 위증 혐의로 기소돼 재판 중이다. 8일 특검은 이 교수에게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정 교수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정년을 1년가량 앞둔 이 교수는 “집행유예 이상의 형을 받으면 연금이 절반으로 줄고, 불명예 퇴직해야 한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정 교수는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다. 두 사람에 대한 선고는 18일이다.

술자리가 끝나갈 때쯤 이 교수의 제자 A 씨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15일이 ‘스승의 날’인데 교수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려야 할지, 선물만 보내야 할지 난감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 사람을 뭘 챙기냐, 김영란법에도 어긋나는데”라는 성화에 그는 “알지 않냐”고 답했다. 비록 정년을 앞두고 있지만 교수님의 눈 밖에 나서 좋을 게 없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의사 사회가 보수적이고 경직돼 있다는 것. 그 속뜻에 공감하면서도 출세하려면 실력보다는 ‘빽’이 중요하다는 현실에 길들여진 것만 같은 씁쓸함이 더 컸다.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된 이들 상당수는 국정을 농단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들어줬을 뿐이라고 변명했다. 누군가는 대개 권력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상대방은 그 부탁을 들어줘야 출세하고 자리를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달리 말해 자신의 든든한 ‘빽’을 기대하고 부탁을 들어줬을 것이다. 이게 가장 먼저 청산해야 할 적폐가 아닐까. 새 대통령에게 기대를 건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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