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문재인 대통령’이 탄생했다. 반갑고 기쁘다. 국화꽃 피어날 때 시작된 촛불 정치가 새 정권의 장미꽃으로 개화하고 우리는 ‘나라다운 나라’에 대한 소망을 품으며 보다 고양된 민주주의로 국격(國格)이 오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나는 환호하는 시민들 모습을 보며 감사했고, “아름답고 힘찬 대한민국이여, 축복받으라”는 내 안 깊숙이 솟는 축하의 인사를 드렸다. 우리 모두가 바라는 대로, 그리고 새 대통령이 약속한 대로 우리의 소망이 쉽사리 이루어질 리 없고 숱한 어려움과 실망을 견뎌내야 할 것은 분명하지만, 어느 날 문득 솟구쳐 오른 환희의 벅찬 소감은 우리 가슴과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4·19와 6·10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활화산으로 다시 솟아 우리의 미래를 힘차게 꽃피울 힘이 되리라.
9일 투표장으로 갈 때만 해도 내 마음은 어두웠다. 어쩌면 내 생전의 마지막 투표일지도 모른다는 것, 그래서 내일이면 우리의 19번째이지만 나로서는 마지막 대통령일 수도 있을 인물에게 우리가 맡기고 기대하는 일이 역대의 누구보다 어려운 임무일 수 있다는 것 등등 비장한 생각들에 젖었던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아마도 19세기 후반 개항기 못지않게 까다롭고 난감한 상태에 부닥쳐 있다. 주변 강대국들은 작은 한반도를 놓고 각축을 벌이고 있고 그 분단된 땅은 6·25전쟁 이후 가장 심각한 대결 상태에 빠져 있다. 내부적으로는 경제 문화가 선진 수준으로 진입했다지만 사회적 개인적 삶은 오히려 불행감이 심해져 갖가지 ‘포기’ 현상을 일으키고 우리 정치는 탄핵이란 가장 참담한 사태로써 민주주의의 선진화를 확인하려는 역설에 빠져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13명의 후보로 태스크포스를 만들어도 못 풀 상태에서 나는 단 한 사람에게 표를 주어야 했다. 그랬기에 새 대통령에게 먼저 드리고 싶은 당부는 그 여러 후보자, 그들을 통해 드러난 국민의 의지를 모으고 아껴 종합과 탕평의 정책과 인사를 써달라는 것이다. 안보로 안심시키려고, 미래 산업혁명을 대비하자고, 행복의 경제를 펴려고,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나누자고 호소한 여러 후보의 주장을 스스로 장담한 대로 균형과 포용의 ‘대통합’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이다. 대통령은 여러 주장과 갈등을 중재하며 화해를 통해 가장 큰 성과를 거두는 통합의 구심이어야 한다. 그러자면 정치적 정책적 종합만이 아니라 링컨이나 오바마가 그랬듯, 인사의 탕평도 당연히 요구된다. 블랙리스트로 배제의 통치를 강제한 전임자가 좋은 반면교사다.
후보 시절에 강조한 ‘통합 대통령’이란 말을 내가 다시 음미한 것은 내적 탕평만이 아니라 국제관계에서의 다면적 대응을 위해서였다. 지금 우리는 차라리 냉전시대였으면 대결하기 간명했을 국제 문제가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더욱 까다로워진 사태에 직면해 있다. 진퇴가 난감한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예측이 어려운 미국을 진정시키고 극우로 달리는 일본을 만류하고 의구심으로 견제하는 중국에 믿음을 안겨 주고 핵무기 개발에 진력하는 북한을 제어할 다면적인 정책과 다양한 인재가 필요하다. 친미파, 지일파, 친중파, 혹은 북한전문가 모두를 활용하면서 마키아벨리적 지혜를 발휘할 대범함이 요청되는 이유다.
국민과 후보들이 하나같이 동조한 바람과 공약은 ‘일자리 창출’이었다. 그만큼 절실하면서 다양한 해법을 요구하는 이 과제에서 나는 무엇보다 앞서 청년세대의 취업과 비정규직의 철폐를 선행돼야 할 과제로 꼽는다. 그것들은 ‘5포 세대’의 절망을 지우며 사회적 공의를 향한 지름길이다. 여기서 단순한 경제수치의 상승이 아니고 소외계층과 소수자 집단을 위한 질적 평등과 문화 복지, 내가 바라온 ‘인간의 얼굴’을 한 발전이 보일 것이다.
나는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선거 연설에서 정말 바라온 한 구절을 반갑게 맞았다. “겸손하되 당당하게.” 겸손은 인간적 미덕이면서 공적 포용력을 가지며 당당함은 통치자로서의 자신감이자 내적 의연함을 품는다, 인권 변호사 출신의 새 대통령은 그 품위와 격조를 지키며 정도(正道)와 소통을 통해, 겸손하되 당당한 태도를 지켜 주리라 믿는다. 그래서 “희망과 새로운 신뢰”를 우리 모두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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