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선거와 국정은 달라… 협치부터 성공해야 개혁 동력 생겨”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2일 03시 00분


[문재인 시대/해외 석학 인터뷰]프랜시스 후쿠야마 교수 ‘문재인 정부에 바란다’
교집합 못찾는 정치는 ‘자폭’ 귀결… 트럼프 조심스럽게 다뤄야
‘북핵 해결에 韓도움 필수’ 강조해야

“이제 협치(協治)는 선택이 아닌 정치적 생존의 문제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도 협치를 안 하면 거대 야권의 ‘거부 정치(vetocracy)’ 파고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냉전 종식 이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승리를 선언한 ‘역사의 종말’ 등의 저서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프랜시스 후쿠야마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65·사진)는 10일(현지 시간) 동아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갖고 이렇게 강조했다. 국제정치학계의 세계적 석학이자 현대 정치의 쇠퇴와 타락에 경종을 울려 온 그는 “굳이 문 대통령이 처한 정치적 환경, 특히 국회 내 의석수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현대 정치는 자기 의견만 주장한 채 서로 양보나 협상을 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종말(terminated)을 맞을 수밖에 없다”고 조언했다.

대학 강의는 물론 브라질, 대만 등 세계를 돌며 밀려드는 특강 요청을 소화하고 있는 후쿠야마 교수는 한 달여 전부터 기자와 e메일을 주고받으며 주요 후보들의 지지율 추이를 점검하는 등 한국 대선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날 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첫 통화가 이뤄진 후 스탠퍼드대 연구실에서 기자와 1시간가량 전화 인터뷰를 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후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정치적 과제, 북핵과 한미동맹 등 외교안보 이슈를 특유의 통찰력으로 폭넓게 진단했다. 이하는 일문일답.

―한국 대선에 관심이 컸는데 정치학자로서 소감이 어떤가.

“이번 한국 대선은 일반인은 물론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귀중하고 특별한 이벤트였다. 헌정 사상 첫 탄핵을 거쳐 열린 대선을 명예롭고 평화적으로 치러냈다는 데 한국인들은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트럼프 대통령 식으로 말하면 ‘굿 잡(good job·잘했다)’이다.”

―문 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협치와 소통에 나서는 모양새다. 취임식 전에 야당을 찾아가고 국무총리 후보자를 직접 발표하는 등 이전 정권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어떻게 평가하나.

“꽤 좋은 징조(pretty good signal)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기본 중의 기본이다. 아마 이전 정권에서 보지 못한 장면이라 한국인들이 더 새롭게 느낄 수 있겠지만 다른 선진국에선 보편화된 장면이다. 내가 몇 년 전부터 ‘거부 정치’(veto+cracy)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견제와 균형을 빌미로 서로 무조건 반대만 하다가 최소한의 정치적 교집합을 찾아내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정치권 전체가 자폭해버리는 현대 정치의 특성을 지칭한 것이다. 미국에서도 첨예한 정치 대립 끝에 행정부가 일시적으로 ‘셧다운’(예산 중단으로 정부 기능 정지)하는 자충수를 두면서 시민들의 정치 혐오감이 확산됐고, 그 결과로 ‘워싱턴 아웃사이더’인 트럼프 대통령이 탄생한 것 아닌가. 문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더 치열하게 협상하고 먼저 야당을 찾아가야 한다. 안 그러면 거대 야당이 드리우는 ‘거부 정치’의 파고에 휩쓸려 제대로 힘을 써보지 못할 것이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임종석 신임 대통령비서실장의 과거 민주화운동 경력을 문제 삼으며 ‘거부 정치’를 벌일 태세다.

“관성이라는 게 있다. 협치란 게 하루아침에 되지 않는다. 과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더 어려울 수도 있는 게 협치, 협상이다. 하지만 양당 구도가 무너지고 군소정당까지 5개 당으로 나뉜 상황은 오히려 서로 협상할 수밖에 없는 정치적 여건을 제공할 수도 있다. 한국이 과거 여소야대 구도였던 노태우 정부 시절 오히려 과거사 청산(5공 청산)을 위한 여야 간 협상이 잘된 게 그런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이 협치와 소통에 나섰지만, 동시에 선거 과정에서 ‘적폐 청산’을 내걸었다. 자칫 상반되는 개념인데 어떻게 전망하나.


“선거 때 ‘적폐 청산’을 내거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이를 국정의 메인 캐치프레이즈로 사용한다면 상대방이 가만히 있겠나. 중장기적으로 치밀하게 해도 성공 확률이 높지 않은 게 기존 시스템을 바꾸고 ‘앙시앵 레짐(ancien r´egime·구체제)’을 몰아내는 일이다. 트럼프가 취임 전부터 ‘워싱턴의 오물을 치워버리겠다(drain the swamp)’고 주장했는데 문 대통령의 ‘적폐 청산’ 구호와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트럼프가 치워버리겠다고 한 ‘오물’인 기성 워싱턴 정치권의 협조 없이는 법안 하나도 통과시킬 수 없다. 심지어 상하 양원을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뒤늦게 정적(政敵)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해 만찬하고 대화에 나서는 것이다. 그럼에도 ‘트럼프케어’(새 건강보험안)는 재수 끝에 하원을 간신히 통과할 수 있었다. 문 대통령도 진심 어린 협치와 소통이 우선이다. 그렇게 정치적 자산이 쌓이면 자연스레 과거의 잘못된 것을 없애고 시스템을 개혁할 수 있는 동력을 얻게 될 것이다. 그래야 한국 정치가 지금처럼 갈수록 극단화(polarization)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런 정치학적 진리는 동서가 다르지 않다.”

―문 대통령 취임 후에도 워싱턴에선 여전히 트럼프 대통령과 호흡이 잘 맞을까 하는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문 대통령은 트럼프와의 관계 설정에 앞서 지금 한국이 어떤 지정학적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단언컨대, 문 대통령은 한국 헌정 사상 가장 복잡하고 어려운 외교안보적 구도를 이전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어느 한 사람이, 한 국가가 풀어낼 수 없을 정도로 꼬여 있다. 이럴수록 차분하게, 우선순위를 정하는 방식으로 일을 풀어가야 한다. 자신이 집권했다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가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건 아니지 않나. 결국 북핵을 머리에 이고 있는 현 상황을 풀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을 강화한 뒤 그 다음 스텝을 밟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문 대통령은 김정은 못지않게 트럼프 대통령을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한다. 트럼프는 특유의 불가측성에다 인성적으로도 휘발성이 강한 사람이다. 언제 어떻게 튈지 모른다. 트럼프는 71세다. 그 나이 되면 잘 바뀌지 않는다. 미국 대통령으로 그런 상대를 만난 것을 엄연한 현실(status quo)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하면 서로 최선의 결과를 도출할 수 있을지만 생각해야 한다.”

―인터뷰 전 있었던 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첫 통화는 어떻게 평가하나.

“시기는 적당했다. 외교, 국제정치라는 것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다. 서로 알아가고 접점을 찾다보면 몰랐던 장점도 서로 발견하게 되고 친구가 될 수도 있다. 문재인, 트럼프는 서로 확연히 다른 성향의 사람이지만 국익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포커페이스’를 써야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북 기조도 다르고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 갈등적 이슈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한미 양국이 마냥 아름답게 타협하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얼마 전 사드 10억 달러 청구 발언을 했다가 허버트 맥매스터 국가안보보좌관이 이를 사실상 부인하자 격노했다고 한다. 진실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트럼프는 만만치 않은 상대다. 문 대통령 입장에선 트럼프에게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한국의 도움 없이 북핵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면 트럼프도 한국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거나 관심을 보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도 ‘적절한 환경’이 되면 김정은을 만나겠다고 했고, 문 대통령도 여건 조성을 전제로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을 시사했다. 이 시점에서 북미, 남북 간 대화를 어떻게 전망하나.

“김정은 입장에서 생각하면 상황이 명쾌해진다. 김정은의 제1목표는 체제 유지다. 이를 위해 아버지 김정일 시절부터 6자회담 등 온갖 대화 채널에 나서는 척하면서 뒤로는 국제사회를 기만했다. 그런데 김정은이 변하지 않았는데 미국이나 한국이 대화를 한다? 대통령으로서 정치적으론 매력적인 이슈지만,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몇 배로 화(backfire)를 입는 뜨거운 감자 같은 이슈다. 김정은이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에서 잠시 숨 쉬고 다른 전략을 구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역효과도 낳을 수 있다. 이 문제는 북한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뒤에 논의해도 늦지 않다. 현재는 대화의 문이 열려 있다는 시그널을 주는 정도가 적당하다.”

―사드 배치로 중국과의 관계도 어느 때보다 복잡한데….

“미중 사이에 끼어 있는 한국의 선택은 늘 쉽지 않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초 외교적으로 실수한 것 중 하나가 한국이 미중 간에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고 너무 노골적으로 나선 것이다. 균형자를 하더라도 조용히, 은밀하게 수행하는 게 외교인데 이를 마치 선거 유세하듯 했으니 미국과 중국 모두 좋아했을 리가 없다. 단기간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우선 한미관계를 공고히 한 뒤 머리를 식히고 베이징과도 관계 개선을 모색해야 한다.”

워싱턴=이승헌 특파원 dd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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