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대통령들은 초심과 달리 시간이 흐를수록 청와대에 갇혀 ‘밑바닥 여론’과 유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일은 비단 한국뿐 아니다. 미국에선 대통령이 대중의 일상으로부터 멀어지는 현상을 가리켜 ‘백악관 버블(White House bubble)’이라고 불렀고, 이를 보완하는 사적 참모 그룹이 키친 캐비닛이다. 정치권 원로 인사들을 포함해 대통령의 공조직과 관계없이 오랜 인연과 신뢰를 바탕으로 대통령에게 바닥 민심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역할을 했다.
지난해 말 탄핵 정국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법률대리인단은 최순실 씨가 어느 정부에나 있는 키친 캐비닛이라는 방어논리를 폈다. 키친 캐비닛이 성공하려면 대통령과 사적 이해로 얽히지 않고 여론을 공정히 전달할 인물이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송기인 신부 등 부산 지역 인맥, 부산에서 변호사를 할 때 맺은 법무법인 부산,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네트워크, 경남고와 경희대, 사법연수원 동기, 특전사 등의 개인적 인맥을 갖고 있다. 문 대통령의 지인들은 그를 공사 구분이 지나칠 만큼 분명한 원칙주의자로 기억했다. 이들은 과연 문재인 정부에서 제대로 된 키친 캐비닛 역할을 할 수 있을까. 》
▼노무현 前대통령와 인연 ‘부산팀’-‘법무법인 부산’ 변호사들 수십년 동지▼
문재인 대통령은 ‘원칙주의자’에 말수가 적은 까닭에 사적인 인맥의 폭이 그리 넓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한 번 맺은 인연을 중시하는 편이어서 지인 중에는 오랜 친분으로 묶인 이들이 적지 않다. 문 대통령 인맥의 핵심은 정치적 고향인 ‘부산’과 경남고, 경희대 학맥 그리고 사법연수원 인맥 등으로 압축된다. 이 밖에 문화예술계 인사들과의 교류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 문 대통령 인맥의 시작 ‘부산’
문 대통령이 허물없이 만날 수 있는 인맥 가운데는 부산에서 재야 활동을 하면서 만난 지인들이 먼저 거론된다. 부산경남 지역 민주화 운동의 대부로 꼽히는 송기인 신부(79)는 문 대통령과 오랫동안 교분을 맺었다. 송 신부와의 관계는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1981년 9월 일어난 ‘부림(釜林)사건’ 진상 규명 운동을 벌이면서 무료 변론을 맡았다. ‘부산의 학림사건’의 약칭인 부림사건은 부산에서 독서모임을 하던 학생 교사 등 22명이 공안당국에 불법적으로 감금·체포돼 이 중 19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기소된 사건이다. 문 대통령은 이때 부산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던 송 신부와 인연을 맺었다.
송 신부는 1997년 부산인권센터를 만들 때도 문 대통령과 공동 대표를 맡았다. 문 대통령은 최근에도 신년 세배를 위해 송 신부를 찾는 등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부림사건 피해자들은 2014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노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활동하는 동안 인연을 맺은 측근들로 이뤄진 ‘부산팀’은 문 대통령과 사적 공적으로 얽힌 사이다. 김경수 전재수 최인호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부산팀이다. 부산팀은 이번 대선에서도 문 대통령 캠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부림사건 피해자인 이호철 전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은 2002년 노 전 대통령이 당선된 대선에서 문 대통령이 좌장을 맡았던 ‘부산팀’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이번 대선에선 영남권을 돌며 문 대통령 선거를 조용히 지원했다. 그는 “내 할 일은 다했다”며 문 대통령 취임 날 동유럽으로 출국했다.
문 대통령이 대표 변호사로 일했던 ‘법무법인 부산’ 출신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출신들도 든든한 지원군으로 꼽힌다. 노 전 대통령의 조카사위인 정재성 현 법무법인 부산 대표 변호사, 소말리아 해적 국선변호를 맡은 권혁근 변호사 등이 대표적이다. 민변 출신 인맥으로는 백승헌 전 민변 회장, 이광철 전 민변 사무차장, 한승헌 전 감사원장 등이 있다. 문 대통령이 부산 민변 창립을 이끌었던 만큼 민변 출신들과의 관계는 끈끈하다. 과거 문 후보 후원회장을 맡았던 고 김창국 전 국가인권위원장과 고영구 전 국가정보원장도 민변 출신이다.
○ 경남고-경희대 인맥
경남고 동기 인맥으로는 건축가 승효상 씨와 황호선 부경대 교수가 대표적이다. 경남고 동문 활동을 하지 않았던 문 대통령은 지난해부터 총동문회는 물론이고 재경동문회, 등산모임 등에 자주 참석한 것으로 알려졌다. 승 씨는 노 전 대통령의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묘소를 설계했으며 2012년 대선에서도 문 대통령의 멘토단에 참여했다. 황 교수는 2014년 지방선거에서 부산 사상구청장에 출마했을 당시 문 대통령이 직접 지원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또 민주당 배갑상 부산선거대책위원회 공동선대본부장, 김좌관 대선캠프 환경에너지 정책팀장 등도 문 대통령의 경남고 동문이다.
경희대 인맥의 핵심으로는 단연 정동채 전 문화관광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좌장으로 손꼽힌다. 그는 이번 대선에서 문 대통령 측 캠프의 직능조직인 ‘더불어포럼’의 공동대표를 맡아 문 대통령을 지원했다. 문 대통령 측 핵심 인사는 “정 전 장관이야말로 문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좌절을 겪은 뒤 5년간 가장 가까이에서 문 대통령을 지켜온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다”고 밝혔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이기도 한 정 전 장관은 문 대통령의 ‘호남 홀대론’에 맞서 호남 민심을 달래는 역할도 해왔다. 이번 대선의 숨은 공신이면서도 드러내 놓고 활동하지 않는 문 대통령의 ‘복심’으로 꼽힌다.
문재인 캠프 특보단장을 지낸 민주당 김태년 의원도 경희대 인맥으로 분류된다.
○ 문 대통령 ‘운명’의 시작 사법연수원 인맥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박정규 김앤장 변호사는 문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동기(12기)다. 박 변호사는 1982년 문 대통령이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때 시위 전력으로 판사 임용에서 탈락하자 문 대통령을 부산에서 변호사 활동을 하던 노 전 대통령에게 소개한 인물로 유명하다. 문 대통령은 자신의 자서전인 ‘운명’에서 박 변호사와의 인연을 소개한다. 노 전 대통령과 함께 변호사로 일하기로 약속했던 박 변호사가 뒤늦게 검사로 임용되면서 생긴 빈자리에 문 대통령을 소개해준 것이다. 박 변호사는 노 전 대통령과 경남 김해에서 함께 고시 공부를 했던 인연이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을 전혀 몰랐던 문 대통령 입장에서 박 변호사가 당시에 검사 임용이 되지 않고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면 ‘운명’은 시작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또 연수원 동기로는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전 대법관, 송두환 전 헌법재판관, 이귀남 전 법무부 장관, 박병대 대법관, 국민의당 조배숙 의원, 박은수, 고승덕 전 의원 등이 있다. 문 대통령은 박 시장과 이번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예비 경선에서 후보로서 치열하게 경쟁했다. 비록 박 시장이 중간에 대선 불출마 선언을 하고 직접적인 대결은 하지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문 대통령은 박 시장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박 시장은 최근 문 대통령과 사법연수원을 수료할 당시 찍은 기념사진을 페이스북에 공개했다.
문 대통령의 사법연수원 인연으로 이용훈 전 대법원장도 회자된다. 이 전 대법원장은 최근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사법연수원 교수 할 때 (문 대통령이) 연수원생이었다. 차석으로 졸업했는데 전과(1975년 6월 특수공무집행방해,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가 있어서 판사가 못 됐지만 원래는 판사를 하고 싶어 했다”고 밝혔다. 이 전 대법원장은 이때의 인연 등으로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심판 때 변호인단으로 문 대통령을 다시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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