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개혁이라는 구호 아래 정부가 기업들을 휘젓지는 않을까 걱정입니다. 벌써부터 한국 대기업들이 제품을 제때 공급할 수 있는지 우려하는 고객사도 많습니다.”
국내 대기업 A사 관계자가 15일 문재인 정부 체제에서 사정기관의 ‘기업 손보기’가 본격화될 수 있음을 우려하면서 한 말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 당시 검찰 경찰 국세청 공정거래위원회 감사원 중소기업청 등 범정부 차원의 ‘을지로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약속했다. 재벌의 갑질 횡포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와 수사를 강화하겠다는 취지다. 반면 중소기업들은 이런 정책 기조를 가진 새 정부 출범으로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나타내고 있다.
○ 희비 엇갈린 대기업과 중소기업
동아일보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10∼12일 31개 대기업과 30개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설문조사에서 이런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온도 차가 뚜렷이 드러났다.
대기업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상호출자·채무보증제한 기업집단’(자산총액 10조 원 이상)에 포함된 곳이다. 중소기업은 자산 5000억 원 이하의 중소기업중앙회 회원사다.
대기업들은 정부의 기업정책이 기업의 글로벌 경쟁력에 타격을 입힐 수도 있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기업 조사와 수사 강화뿐 아니라 증세도 예상되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재원이 부족할 시 현재 22%인 법인세 최고세율을 25%로 원상 복귀시키겠다고 공약했다.
대기업들은 신임 대통령 공약 중 부정적 효과가 가장 클 것으로 보는 경제정책(이하 복수응답)으로 ‘법인세 인상’(33.9%)과 ‘재벌 개혁’(22.6%)을 선택했다. 대기업 B사 관계자는 “미국을 봐도 법인세 인하가 세계적 추세다. 법인세 인상은 글로벌 트렌드에 역행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계는 새 정부가 불공정 거래를 근절하고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제도를 확대해 사업 기회가 확대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급식업체를 운영하는 중소기업 C사 대표는 “단체급식 시장이 연간 4조 원에 이르는데 10개 미만의 대기업이 90%를 점하고 있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방지한다는 공약에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다. 실제로 중소기업인들은 이번 조사에서 새 정부에 바라는 정책으로 ‘공정 경제 추진’(33.9%)을 가장 많이 꼽았다.
○ 분배도 좋지만 성장 전략도 필요
중소기업계가 새 정부의 정책 기조에 마냥 기대감만 높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법정 노동시간이 단축되고 최저임금이 1만 원으로 높아지면 작은 기업일수록 비용 감당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인 D 씨는 “노동시간 단축은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고 일갈했다. “얼핏 보면 일자리가 창출될 것 같지만 경기가 침체되고 매출이 늘어나지 않으면 결국은 직원부터 줄이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법정 노동시간 52시간’에 대한 걱정은 중소기업(37.9%)이 대기업(21.0%)보다 더 컸다.
정부가 장기적인 성장 전략부터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도 나온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번 정권은 분배, 배분이 핵심이고 ‘인간다운 삶, 헌법에 충실한 경제정책’을 하겠다고 했는데 성장 비전이 약하다”고 지적했다. 신박제 NXP반도체 회장도 “대기업이 세계무대에서 원활하게 영업하며 수출을 많이 하면 중소기업에도 혜택이 전해지고, 대기업이 어려워지면 중소기업도 타격을 받는다”며 “중소기업이건 대기업이건 세계시장에서 경쟁자를 물리칠 수 있도록 정부가 튼튼한 버팀목이 돼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제계에서는 일자리 창출을 위해서라도 ‘규제 개혁’과 ‘노동 개혁’이 동시에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기업들은 일자리 문제 해결 방안으로 ‘기업 투자 활성화를 위한 규제 개혁’과 ‘노동 유연성 확보’(이상 21.8%)를 가장 많이 원했다. 김경수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어떤 정책이든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가장 중요한 건 정부가 하루빨리 청사진을 발표해 정책 불확실성을 줄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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