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5·18민주화운동 37주년]5월 상황일지 일련번호 19개 누락
과잉진압-집단발포 일어난 18∼21일 집중적으로 빠져
‘21일 13시10분 폭도 도청 점거’ ‘14시10분 난입 시민 물러나’
중간에 긴박했던 순간 보고는 없어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교수 “군부, 은폐-조작위해 삭제한 듯”
軍, 1988년 청문회 앞두고 ‘511연구위원회’ 비밀조직 운영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공수부대의 전남도청 앞 발포 상황이 주요 군(軍) 기록에서 빠졌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당시 계엄사령부가 작성한 계엄상황일지에 특정 시점의 기록이 사라진 것으로 드러났다. 또 1988년 국회에 제출된 5·18 관련 군 자료는 국방부와 보안사령부 등이 구성한 ‘511연구위원회’가 사전에 기록을 전부 검토한 것으로 밝혀졌다. 주요 기록을 은폐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 군 기록에 없는 시민 사망 보고
1980년 5월 21일 공수부대의 전남도청 앞 발포 상황은 당시 시민을 향한 사격이 누가 명령을 내려서 어떻게 이뤄졌는지 밝혀내는 핵심 열쇠로 알려져 있다. 1990년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그날 발포로 숨진 34명에 대해 정부는 보상을 했다.
광주에 투입된 7공수여단과 11공수여단이 당시 21일 오후 1시를 전후해 시민들에게 발포한 사실은 1988년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광주특위) 청문회와 1995년 검찰의 12·12 및 5·18 수사, 2007년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과거사위) 조사에서 밝혀졌다.
그동안 군은 총을 쏜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군의 자위권 행사에 의한 것이며 아무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주장을 펴 왔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당시 작성된 계엄사령부의 ‘계엄상황일지’와 2군사령부 ‘계엄상황일지’,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작전상황일지’ 및 ‘작전일지’, 특전사 ‘전투상보’, 31사단 ‘전투상보’를 확인한 결과 21일 오후 집단 발포에 따른 시민 사망 보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계엄사령부의 상황일지 21일자에는 ‘13시10분 폭도에 의해 전남도청 및 도경 점거’, ‘14시10분 도경 및 도청에 난입했던 시민은 물러나고 계엄군과 군중은 도경 및 도청 정문 앞에서 대치중이며 계엄군은 건물 주위를 경계하고 있음’이라고만 적혀 있다. 2군사령부 상황일지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전교사 작전상황일지에는 ‘13:00 도청 앞 시위군중 장갑차와 버스로 군경에 돌진. 군경의 최루탄 발사 도청진입 방어’라고 기록돼 있다.
안종철 5·18유네스코등재추진단장은 “21일 집단 발포는 5·18민주화운동의 분수령이 되는 중요한 사건”이라며 “군부가 당시 기록된 집단 발포 상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으로 보고 사후에 삭제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동안 청문회와 검찰 수사 및 재판,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 등이 있었지만 발포 명령자는 밝혀내지 못했다. 1995년 검찰은 전두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신군부를 자위권 발동의 주역으로 지목했다. 1심 판결도 ‘자위권 발동’ 지시가 발포 명령에 해당한다고 해석해 신군부가 발포 명령을 내렸다고 봤다. 그러나 1997년 항소심은 “신군부가 개개인의 피해자에게 살인 행위를 용인했다고 인정할 수 없으며 자위권도 사실상의 발포 명령이라고 볼 만한 명백한 증거 및 자료가 없다”며 1심 판결을 뒤집었다. 대법원도 항소심을 그대로 유지했다.
○ 특정 시기 일련번호 사라진 상황일지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2013년 발표 논문 ‘5·18항쟁 시기 군부의 5·18담론’이란 논문에서 계엄사의 ‘계엄상황일지’에 일련번호 몇 개가 빠져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논문에 따르면 1980년 5월 1일부터 31일까지 작성된 계엄상황일지의 일련번호가 19곳 누락돼 있다. 상황일지를 작성하려면 일련번호를 부여하고 접수 시간 및 송화자, 내용, 처리를 순차적으로 기록해야 한다. 17일 상황일지는 일련번호 2282번으로 끝난다. 그러나 2283번으로 시작돼야 하는 18일자는 2286번부터 시작한다. 2283번부터 2285번까지 빠져 있다. 19일, 20일, 21일, 23일, 25일자에도 일련번호가 사라진 것이 나타났다. 일련번호 누락이 집중된 18일부터 21일까지는 계엄군의 과잉 진압과 발포, 시민들의 무장과 관련한 진실 규명을 둘러싸고 논란이 되는 기간이다. 김 교수는 논문에서 “일련번호 누락이 특정 시기에 집중된 것은 군부가 은폐와 조작을 목적으로 삭제한 것으로 의심된다”고 밝혔다.
○ ‘511연구위원회’의 역할
계엄사 상황일지를 비롯한 5·18 관련 군 기록은 1988년 국회 광주특위 청문회에 제출됐다. 국방부는 여소야대로 바뀐 13대 국회에서 야당의 5·18 진상 규명 요구가 커질 것에 대비해 그해 5월 11일 ‘511연구위원회’라는 조직을 비밀리에 만들어 운영한 것으로 드러났다.
본보가 입수한 ‘511연구위원회 설치(안)’에 따르면 위원회에는 국방부 외에 합동참모본부, 보안사령부, 육군본부,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참여했다. 511연구위원회는 2개월 후 ‘511상설대책위원회’로 확대, 개편된다. 511연구위원회가 작성한 ‘511상설대책위원회 편성(안)’에 따르면 대책위는 7월 11일부터 국방부 제1차관보 직할기구로 운용하며 명령이 있을 때까지 국방부 제3회의실에 설치한다고 돼 있다.
대책위에는 계엄반, 작전반, 법무·감찰반, 보안반, 조사반, 총괄반을 뒀다. 계엄반은 각종 상황일지 및 참고 서류, 영상자료 분류, 작전반은 각 부대 상황일지를 분석, 평가하면서 쟁점사항 답변서 작성을 맡았다. 보안반은 위원회 활동의 보안대책을 강구하도록 했다. 대책위가 군 관련 자료를 국회에 넘기기 전 민감한 내용을 삭제, 은폐했다는 의혹을 사는 대목이다.
1988년 평화민주당 광주특위 실무팀장을 맡았던 송선태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511대책위에 참여한 보안사가 최종 게이트키퍼 역할을 했다는 의혹이 짙다”며 “새 정부가 당시 집단 발포 기록을 찾아내고 군 관련 자료를 사전 검열한 511연구위원회의 실체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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