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당국이 문재인 대통령의 ‘소액·장기 연체 채무 소각’ 공약을 실행하기 위한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갔다.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10년 이상, 1000만 원 이하 연체 채무자의 빚을 전액 탕감해 주겠다는 공약을 실행하기 위한 재원 조달 방안 등에 대한 분석에 착수한 것이다. 일각에선 대선마다 되풀이되는 ‘신용 사면’ 공약이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17일 금융당국 관계자는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 국민행복기금에서 충당할지, 새로운 기금을 만들지 등 재원 조달 방법과 모럴해저드 방지 등 여러 방안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밝혔다. 10년 이상, 1000만 원 이하 요건에 해당하는 연체 채무는 약 1조9000억 원, 대상자는 43만7000명으로 추산된다. 금융당국은 국민행복기금이 인수하지 않은 민간 회사들 소유의 소액·장기 연체 채권과 국민행복기금 인수 시점(2013년) 이후 발생한 채권 등으로 범위를 넓히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공약은 채무를 전액 탕감해 준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보다 강도가 세다. 앞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기금을 설립해 연체 채권을 매입하고 원금과 이자를 감면해 분할 상환하게 해주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따라 2008년 9월 신용회복기금이 출범했고 2013년 3월 국민행복기금으로 전환됐다. 국민행복기금은 올해 2월까지 280만 명의 연체 채권을 매입하고 57만 명(6조3000억 원)에 대해 채무조정을 지원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취임 1년 차에 후보 때 내건 채무 재조정 공약 이행에 나선 점을 고려하면 문재인 정부의 채무 소각 공약도 속도감 있게 실행될 가능성이 크다. 문재인 캠프 특보단장이었던 민병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0년 이상, 1000만 원 이하 연체한 채무자라면 그간 충분히 고통받았는데도 상환 능력이 없는 이들로 봐야 한다”며 “이들이 다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도 저소득층의 재기를 돕는 공약의 취지에 대해서는 대체로 공감하는 분위기다. 다만 대선 때마다 신용사면 공약이 되풀이되면서 채무자의 도덕적 해이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다. 이미 채무자의 경제상황에 따라 신용회복위원회의 개인워크아웃과 프리워크아웃, 회생법원의 개인파산과 개인회생 등 제도를 통해 빚을 성실히 갚고 있거나 불이익을 감내하고 있는 이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도 있다.
이에 따라 공약을 시행하더라도 소득 증빙과 금융자산, 실물자산 조회 등을 통해 요건을 깐깐히 심사하는 등 도덕적 해이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안재욱 경희대 경제학과 교수는 “대선마다 채무조정, 탕감이 반복적으로 일어나면 ‘안 갚아도 결국 국가가 해결해 주겠지’ 하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채무자들이 소득 창출을 통해 빚을 갚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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