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레이션] 5·18, 침묵과 저항의 역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8일 17시 3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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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광주민주화운동 37주년을 맞은 오늘, 기념식이 열린 광주 국립 5·18민주묘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습니다.

국가 공식 행사에서 참석자들이 이 노래를 제창한 건 2009년 이후 9년 만입니다. 전임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이 노래를 “북한을 추종하는 노래”라고 규정한 뒤 제창을 금지해왔습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오히려 민주화 정신을 상징하는 노래로 재 평가한 것이죠.

사실 5·18의 역사는 침묵을 강요하는 정권과 이에 맞서 저항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은 그 사건의 실상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긴 침묵의 암흑기를 거쳐야만 했습니다.

1980년 5월 18일, 신군부의 총칼 앞에 언론은 침묵했습니다. 5·18 민주화운동 관련 첫 보도가 나온 건 3일이 지난 후인 21일이었죠. 그마저도 광주 일대의 참상을 온전히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戒嚴司令部(계엄사령부)는 지난 18일부터 光州(광주) 일원에서 발생한 소요사태가 아직 수습되지 않고 있다고 밝히고 조속한 시일 내에 평온을 회복하도록 모든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1980.5.21 동아일보 1면 ‘광주(光州) 일원 데모 사태(事態)’

사전검열, 보도지침 등 당시 악명 높았던 신군부의 언론통제는 5·18의 실상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가로막았습니다. 당시 동아일보를 비롯한 여러 언론사는 진실을 알리는 기사를 써놓고도 신군부 계엄 당국의 보도검열에 세상에 알리지 못했죠. 그야말로 대한민국 언론사의 흑역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관련기사: 동아일보 2000년 5월 10일. ‘신문기사 절반이 가위질’
1984년, 점차 언론통제의 살얼음판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앞장서 목소리를 냈던 건 당시의 대학생들이었죠. 그해 5월 18일 전국 26개 대학에서 5·18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가 열리고 정권 퇴진을 위한 시위와 농성이 전개됩니다.

당시 본보 보도에 따르면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등 서울 시내 대학 6군데 대학의 참여 대학생 수는 4800명, 광주민주화 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던 전남대에서는 3000여 명이 동참했죠. 기사에 언급되지 않은 대학까지 고려하면 당시 추모 및 시위 행렬에 참여한 전국의 대학생 수는 수만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 1984.5.18 동아일보 11면 ‘전국 26개 대학(大學)서 시위’
※ 1984.5.18 동아일보 11면 ‘전국 26개 대학(大學)서 시위’

1985년 2월 총선에서는 신군부에 대항하는 제1야당 신한민주당(신민당)이 탄생합니다. 그동안 신군부가 정치규제자로 묶어두고 있던 야권 지도자 김대중 김영삼(전 대통령)에 대한 전면 해금(解禁)된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신민당은 둘을 구심점 삼아 창당(1985년 1월18일) 한 달도 안돼 전체 276석 중 67개 의석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그리고 그해 5월 18일, 신민당은 광주민주화운동 5주기를 맞아 특별성명을 발표하죠.

“역사적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진상조사를 거듭 다짐한다.”-1985.5.18 동아일보 1면 ‘圈 두김(金)씨성명(聲明)“광주사태(光州事態)밝히라.”
“역사적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진상조사를 거듭 다짐한다.”-1985.5.18 동아일보 1면 ‘圈 두김(金)씨성명(聲明)“광주사태(光州事態)밝히라.”


이후 매년 5월 18일이면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를 추모하는 기념식 분위기와 그날의 참상을 전하는 증언이 신문 지면에 속속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1986년 5월 19일 동아일보 11면에 실린 ‘흐느낌이 통곡으로…’ 기사에는 광주 망월동 묘지에서 유족들이 통곡하는 장면이 비중 있게 묘사됩니다. 또 같은 날 지면에 전두환 정권 말기 군부 정권에 시민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는 분위기도 전합니다.

※ 1986.5.19 동아일보 11면 ‘재야(在野)·학생(學生) 5백(百)명 종로서 기습시위’
※ 1986.5.19 동아일보 11면 ‘재야(在野)·학생(學生) 5백(百)명 종로서 기습시위’

전두환 정권을 막 내리게 한 87년 6월 항쟁이 있기 약 한 달 전, 5·18일 7주기 즈음에 전국에서 대규모 5·18 추모 및 정권비판 시위가 거행됩니다. 14일에는 전국의 34개 대학교 1만여 학생이 시위에 참여했고, 15일에는 연세대생 3000여 명이 연행학생석방을 요구하며 격렬한 시위를 벌였죠. 이후에도 학생들은 거리시위를 벌이며 ’호헌철폐’ ‘독재타도’ 등을 외치며 저항했습니다. 그리고 5월18일 시위는 학생과 종교계, 언론 등 시민 사회 전반으로 퍼집니다.

※ 동아일보 1987.5.18. 11면 ‘갑호(甲號)비상속 잇따른 추모시위’
※ 동아일보 1987.5.18. 11면 ‘갑호(甲號)비상속 잇따른 추모시위’

6월 27일 한 달 동안 이어졌던 시민들의 시위행렬 끝에 드디어 신군부는 대통령중심제직선제개헌을 수용한다는 내용의 특별성명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5공화국, 전두환 정권은 권좌에서 내려오게 되죠.

5공화국의 시작과 끝엔 5·18민주화운동이 있었습니다. 3저 호황의 호기를 등에 업고도 끝내 전두환 정권이 집권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한 이유가 5·18 때문이라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당시 5공화국은 침묵을 강요했던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 동아일보 1987.7.3 5면 ‘이젠 가슴속의 응어리 풀’
※ 동아일보 1987.7.3 5면 ‘이젠 가슴속의 응어리 풀’


김재형기자 mona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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